하늘이 내려준 자리, 조선 최고의 권력자는 언제나 왕이었죠. 그 다음으로 권력이 센 사람은 후대왕의 어머니이자, 왕의 아내인 왕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왕비는 항상 후궁들에게 밀려서 질투를 하거나, 폐비를 당하기도 하는 비운의 캐릭터인데요. 역사 속에서도 왕비들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을까요? 조선의 퍼스트레이디, 왕비에 대해 알아봅니다.
왕비가 되기 위해선 먼저 세자빈이 되어야 했습니다. 세자빈은 10세 전후에 간택 제도를 통해 뽑혔는데요. 왕자님과 결혼하기를 꿈꾸는 수많은 소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것 같지만 사실 전국에서 드러오는 간택단자는 기껏해야 25명에서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양반들이 자신의 딸이 세자빈이 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기 때문인데요. 일단 딸이 왕비가 되면 집안 전체가 정치권의 극심한 견제를 받아야 했고요. 의상이나 가마 등 비용이 부담되기도 했죠. 최종 면접까지 갔다가 떨어진 처자는 평생 결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간택심사는 미리 내정자를 정해놓고 형식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죠.
당연히 자신의 딸이 들러리만 서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자빈 간택을 위해 금혼령이 떨어지면 나이를 속이거나, 몰래 결혼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결정된 세자빈이 그대로 중전이 된 경우는 단 6명 뿐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오른 왕비의 자리는 어디였을까요? 궁궐 내 왕과 왕비의 공간은 구분되어 있습니다. 왕비의 거처인 ‘교태전’은 경복궁의 중앙에 위치했는데요. 그래서 왕비가 있는 곳을 중궁전, 왕비를 중전 마마라고 부른 겁니다.
왕비가 되면 내명부, 외명부의 수장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는데요. 내명부는 궁에 사는 모든 여성들, 왕과 세자의 후궁, 궁녀들을 이르고, 외명부는 공주를 비롯한 종친 및 사대부의 정실부인들을 모은 집단이에요. 왕비는 왕실의 퍼스트레이디로써 내외명부의 인원들이 하극상을 벌이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관리 감독하는 일을 했습니다. 특히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는 내명부를 완전히 장악해서 궁중 암투의 싹을 잘라버리기도 했죠. 거기다 왕비는 매년 50회가 넘는 국가 제사와 수많은 잔치도 직접 주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왕비의 가장 큰 임무는 뭐니뭐니해도 세자를 낳아 왕조의 대를 잇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요. 일단 왕과 왕비는 정해진 날짜에만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왕비의 월경이 끝난 날을 기준으로 그믐이나 보름은 제외되었고, 60간지를 날짜에 붙였을때 뱀이나 호랑이가 들어가는 날도 안됐고 비, 천둥, 번개가 치는 날도 안됐습니다. 또 일식이나 월식, 제사가 있는 날, 왕비가 아프거나 아프고 난 직후에도 금지됐죠.
이렇게 어렵게 합궁 날짜가 정해져도 왕실 최고 상궁인 제조 상궁의 감독 하에 합궁을 해야만 했습니다. 왕과 왕비가 머무는 방 주변에는 8명의 숙직상궁들이 둘러싸고 지켰습니다. 이때 상궁들은 살아있는 닭을 들고 대기했는데요. 왕이 위급한 순간이 생기면 즉석에서 닭의 피를 먹여 응급조치를 하기 위해서였죠. 금기사항이 너무 많아서 일반적인 부부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는 힘들었습니다. 이에 비해 후궁과의 합궁은 덜 까다로웠기 때문에 후궁이 왕에게 더 사랑받는 것도 흔할 수밖에 없었죠.
왕의 어머니를 ‘대비’라고 부르죠. 대비가 되면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 같지만 오히려 왕비의 정치적인 파워가 가장 셌을 때가 이때였습니다. 왕이 죽거나 정변이 일어나면 옥새는 임시적으로 대비의 소유가 될 정도입니다. 어린 왕을 대신했던 대비의 수렴청정도 익숙하실텐데요. 무려 조선왕조 전체 기간 중 1/8이 대비의 수렴청정 기간이었습니다. 6명의 대비가 수렴청정을 통해 나라를 쥐락펴락했죠.
남성중심사회였던 조선에서 어떻게 여성인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던 걸까요?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여자가 왕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될 수 없는 여성이 어린 왕을 보호하고 조력하게 함으로써 왕위찬탈과 역성혁명을 방지하도록 한 것이죠. 하지만 꼭 수렴청정이 아니더라도 왕비의 지위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생겼기 때문에 왕비가 되는 순간 그 친정은 외척이 되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죠.
화려함보다는 직장인 저리가라 할 정도로 할 일도 많고 인생살이도 팍팍했던 조선의 왕비. 때로는 정치적 투쟁에 휘말려 친정이 몰락하거나 폐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왕만큼이나 비극적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 왕비의 삶, 어떠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