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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Apr 03. 2022

나로 말할 것 같으면

MBTI 말고, 혈액형 말고, 외모 말고, 지역 말고, 학교 말고, 회사 말고...

나를 한마디로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유행하는 트렌드는 알아야 직성이 풀리고, 멜론차트 상위권에 누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OTT별로 1~10위권 콘텐츠는 다 봐야 두 다리 쭉 뻗고 잠든다. 이렇게 콘텐츠를 좋아하지만 취향 티 내기 싫어 어디 가서 아는 척 안 한다. 사찰당하는 기분이 들어 SNS도 비공개 눈팅 계정 하나와 필름 카메라 사진만 몰래 올리는 익명 계정을 가지고 있다. 친구들과 메뉴를 정할 때도 '너네 먹고 싶은 거'를 먼저 던지는 게 속 편하고 모임에서 주목받는 건 싫은데 안 챙겨주면 서운해한다. 나라는 사람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굉장히 복잡한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회에 발을 담그게 되면서부터 한 줄로 자기 소개하기 어려운 나는 사회에서의 경쟁력이 떨어진다 느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나를 만들어내야 했다. 한 줄로 딱 설명 가능한 캐릭터 확실한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인턴으로 첫 출근한 날, 팀원들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 정적을 참다못한 어느 대리님이 ‘대화 주제를 던지는 건 막내여야 한다. 나 때는 점심에 무슨 말할지 전날 밤부터 고민했다’는 조언(인 듯한 갈굼)을 받게 되었다. 그날 이후 자기 전에 드라마 작가 마냥 시나리오를 짰고 시나리오에 맞춰 가면을 쓰고 출근을 했다. 심지어 어떤 날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잠도 못 자곤 했다.


그렇게 몇 개월 후. 환기 목적으로 팀 스위치가 되고 또다시 새로운 팀, 새로운 선배들과 밥을 먹어야 하는 날이었다. 이전의 가르침대로 나는 정적이 이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아무 말을 해대고 있었다. 그때 시크하기로 유명했던 한 대리님이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돼요.”라고 한마디 날렸고,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정직원이 되고, 2년차에 접어들고 보니 '상황판단'을 잘하는 것이 막내 사원의 숙명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윗사람 성향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눈치코치 잘 챙기는 사원으로 진화해가고 있었다.


얼마 전 꽤 높으신 분들 앞에서 자기 어필을 해야 하는 자리가 생겼었다. 만남 일주일 전부터 어떻게 소개해야 그분들이 날 좋게 볼지, 수없이 생각했고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나는 광고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며 아직도 열정! 열정! 열정!을 외치는 4년차 AE로 캐릭터 설정 마쳤고 덕분에 좋은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다. 사실 이 기회는 인턴 시절 나를 의견 명확하고 대범하며 일에 대한 열정 가득한 그런 후배로 기억하는 선배님 덕분이었다. 매번 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너무나도 스트레스였고 그 시간이 지옥 같았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를 한 줄로 표현하기 어렵다. 성선설을 믿으며 인류애 넘치다가도, 성악설을 믿으며 인간을 혐오하기도 한다. 잔잔하고 평온하게 사는 게 삶의 목표면서 누구보다 일희일비에 능하다. 띠부띠부씰을 모으기 위해 포켓몬 빵을 샀고 여기에 위스키 한 잔을 곁들이는 알 수 없는 취향을 가졌다. 성격 MBTI는 매번 INFP가 나오지만 직장 MBTI는 ENTP가 나온다. 원래 성향도 복잡한데, 겨우 쥐어짜 낸 사회생활용 캐릭터들이 겹치면서 나란 사람은 더욱 다채로워졌다.


Z세대 특징 중 하나가 멀티 페르소나라고 한다. 이들은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고 하나의 성격에 국한되지 않으며 여러 ‘부캐’를 만들어 입체적으로 삶을 만든다. 여러 개의 가면을 가지고 상황마다 바꿔 쓰면서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Z세대의 트렌드라 명명되기 전부터, 스스로 여러 가면을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M세대 나이지만 누구보다 트렌디한 사람이었던 걸까! (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줏대 없고 갈대 같은 내 마음을 무척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켜켜이 쌓인 나,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나, 그냥 그 자체가 나라고 받아들이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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