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여정 Jan 19. 2022

염일방일(拈一放一):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


정말 잘할 수 있을까?라는 염려스러움도 잠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아 1초도 망설임 없이 '밥 안 차리기 찬스'를 잡았었다. 남편이 주방일을 전담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더 많은 시간 책 읽기, 새로운 사업 시작, 자격증 취득, 강의 듣기, 운동, 아이들 책 더 많이 읽어주기, 글 쓰기 등등 시간이 없어 미루거나 간만 봤던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기레인지 아래 싱크대 문을 열고는 우리 집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물체를 발견했다. 바로, '미*' 조미료다.

양보다는 질을, 맛보다는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나의 살림에 조미료가 나타나다니! 다른 싱크대 문을 열어보니 '***유'가 오일병 바닥에 몇 방울 남아있다.

명절이면 선물로 두 상자 정도는 오일세트가 들어오는데 기름기가 성조숙증에 영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최소한의 양만 올리브유로 구입하여 아껴 먹는 편이고 되도록 찌거나 삶아서 기름기를 빼고 요리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빠 최고!'라고 했던 음식들은 핫도그, 튀김, 만두, 너겟, 토스트, 피자, 강정, 부침개, 프라이 등등 기름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나마도 에어프라이어가 있어 덜 사용했다고 하지만 오일이 몇 통째인지, 선물 받은 게 남아있지 않았다. 아뿔싸! 도로아미타불 된 기분이었다.

내가 손가락 두 개로 조미료를 들어 올리자 남편은 "돈 주고 산거야" 라며 버리기야 하겠냐는 듯 말했지만 난 바로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그러자 딸이 "아빠, 그러니깐 연* 샀어야지" 라며 천연이라고 광고하는 조미료 이름을 댔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도 안돼!" 그러면서 성조숙증을 위해 기름을 덜 썼으면 좋겠다며 다른 집 엄마들의 이야기를 했더니 "딸, 이제 풀떼기랑 누룽지만 먹자" 이런다.

어이가 없어 "내가 살림 다시 할게, 가족건강이 우선이지" 하며 지지 않고 말했더니 한참 후 "알았어. 맛없게 할게" 라며 남편은 처음의 약속을 지키는 방향으로 꼬리를 내렸다. 남은 휴직을 마음 편하게 하기 위한 선택인 듯하다.


난 어렸을 때, 아토피가 심했다. 어느 날 성당에서 신부님이 조미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간을 상하게 하는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엄마는 집에 오시자 마자 주방에 있는 각종 조미료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날부터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토피가 나은 건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조미료가 인체에 끼치는 악영향이 치명적이어서 판매 정지가 된 적은 없다. 전 세계적으로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모두 조미료가 있다.

그럼에도 내가 조미료를 싫어하고 맛보다는 건강을 챙기는 이유는 '몸은 정직하다'는 신조가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아토피가 있거나 몸이 약한 사람들은 음식을 먹었을 때 '느낌' 이 있다. 얼큰하거나 매콤한 자극적인 맛이 아닐지라도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2끼 이상 먹으면 피부가 뒤집어지려는 조짐, 속이 불편함, 두통, 가스가 차는 등 반응이 있다. 조미료가 무해하고 건강에 좋다면 왜 이런 반응이 올까? 나를 닮아 피부가 약한 우리 아이들도 며칠 음식에 신경 써서 해주면 피부가 달라진다. 육식을 멈추면 비염이 없어지는 것처럼.(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나와 딸이 육식을 일주일간 안 하자 재채기가 안 나왔다. 지금은 나만 육식을 안 하고 있다)

다시 조미료가 없는 주방은 되었지만 오일류 사용량이 조금 줄어들었을 뿐이고 에어프라이어는 더 열심히 쉬지 않고 돌고 있다.

아이들 어렸을 때 먹는 거에 신경 쓰면 주위에서 "학교 가면 불량식품 다 먹어. 미리부터 먹어놔야 안 좋은 거도 이겨낼 수 있어" 라며 핀잔을 주었다. 어떤 논리인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다행히 안 좋은걸 사 먹을 수 없는 시골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학교에 다녀도 안 먹는' 아이들로 자라고 있다. 그런데 사 먹을 수 없는 것들을 냉동식품으로 사 와서 굽고 튀기고 뿌려가며 먹였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건강이냐 자유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럼 내가 살림할게"라는 말을 할 때만 해도 화가 나서 뱉었지만 남편이 "정말? 오예~~" 할까 봐 불안했다. 다행히 조미료를 물리치고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나의 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 있을 거란 걸 알게 되었다.

남편 휴직 전에는 4시 30분이 되면 아이들이 집에 오기 때문에 그다음 업무는 아이들이 잠든 이후나 다음날 처리해야 했다. 육아휴직 후, 6시 30분까지는 그날의 일을 완벽하게 끝낼 수 있다. 아이들을 재우고 다시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 잠들까 봐 불안하지 않다. 이 외에도 외근이 없는 날이면 재택근무를 하며 밀린 빨래와 밑반찬 만들기, 은행 일 처리, 청소를 하느라 머리가 산발이 되었던 모습이 사라지고 '업무에 집중' 하는 단정한 직장맘의 모습이 되었다. 이 이면에는 반조리 식품 구입, 건조대에 걸친 듯 매달려있는 쭈글쭈글한 빨래, 읽을 수 없는 외래어로 쓰여 있는 소스병들, 수많은 플라스틱 포장 용기 배출, 외식비용 발생, 발에 밟히는 과자 조각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도 시간이 지나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견주어 포기가 되고 오히려 그동안 예민하게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복직이 다가옴에 따라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것들도 저세상의 것들이 될 텐데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의 생각이 반복되자 어느 순간 과자 가루 덮인 거실 바닥에 누어 TV를 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닷가에 놀러 갔다.

바닷가의 시원함을 느끼며 봉투를 꺼내 주변 쓰레기를 주었다. 5분만 주어도 폭죽과 장갑, 노끈, 비닐 등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둘째는 나를 따라다니며 봉투에 쓰레기를 담는다. 놀이처럼 하니깐 즐겁게 한다. 반면 남편과 첫째는 우리를 모른 척한다. 알아달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봉투를 채우면 몇 배 이상이 뿌듯함으로 돌아오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세상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다. 남의 시선, 남편의 못마땅함은 잠깐 내려놓아도 된다.


1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이었기 때문에 여유로움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 지킬 건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살림을 다시 하면 또다시 극성스럽게 찌고 삶아댈 것이고 각을 잡아 빨래를 널고 외식을 줄이고 채소 요리를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할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남편이 시간을 주고 돈을 벌어오는 대신 얻게 될 아내의 챙김일 수도 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그렇더라도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남편의 유급 육아휴직과 '밤 안 차리기 찬스'를 선택할 것이다.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덜 잃으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의 무한 함을 알기 때문이다. 많은 아빠들의 육아휴직으로 아내들이 덜 잃으면서 다양한 것들을 얻고 삶의 행복도가 높아졌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눈치 보는 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