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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Feb 25. 2024

어쩌다 이사

36살 구축 아파트 적응기(1)

새로 분양받은 신축 아파트에서 7년을 살았다. 유치원생이었던 아이가 사춘기 소녀가 될 때까지 세 식구가 단출하게 오손도손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집이었고, 창문밖으로는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들로 눈이 시원해지는 공원뷰를 가졌으면서도 코앞에 맛난 카페와 식당이 많아서 주말이면 슬리퍼 신고도 맛집탐방이 가능했던 그 집을 우리 모두 사랑했다. 집 앞으로 딸아이가 매일 다니는 수학학원, 영어학원 셔틀버스가 오지 않는다는 한 가지의 단점만 빼고. 그곳은 신혼부부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지만, 학교나 학원가가 필수적인 학생을 둔 가족에게는 불편함이 따르는 곳이었다. 한겨울에도 집에만 들어오면 언제나 따뜻하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주차 걱정 없는 그 편안함과 주변에 널린 맛집들의 달콤함에 빠져 이 불편한 진실을 오랜 시간 외면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 아이는 어느새 고학년이 되었고 일하다 말고, 밥 하다 말고, 매일 저녁마다 어김없이 하원시간에 맞춰 차 안에서 애데렐라 모드로 딸을 기다렸다 데리고 오는 일에 점점 지쳐가던 작년 가을, 결국 나는 이사를 결심했다.


한 번 마음을 먹자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세 식구의 추억이 가득한 소중했던 첫 집을 내놓고, 아이의 학교와 학원생활 위주로 우리가 살 곳을 알아보고, 대체 이런 게 왜 있었을까 싶었던 물건들 포함 많고 많은 짐을 빼고 또 그만큼 진절머리 나게 많고 많은 짐을 넣고(정말이지 0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 사이 한 달간의 인테리어 공사까지. 그렇게 폭풍 같던 가을을 보내고 난 후, 뼈가 시리게 추웠던 1월의 어느 날부터 우리는 36살 된 구축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벌써 이사 온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슬슬 집이 정리되어 간다기보단 새로운 집에 우리가 조금씩 끼워 맞춰지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집은 일상을 담는 그릇이라더니, 고작 차로 십분 거리로 온 건데도 크고 작은 일상에 변화가 많다. 이전에 무심코 누리고 살던 공간이 없어지면서 그 소중함을 뒤늦게 알게 되기도 하고, 오히려 지레 겁먹고 불편할 줄 알았던 것들은 정작 아무렇지 않기도 한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새로운 생활에 무섭도록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짐 무더기가 전혀 거슬리지 않는 것 포함).


어머님이 보내주시는 볶은 보리가 너무 맛나고 좋아서 우리는 수년째 조금 번거롭더라도 평생 매일 보리차를 끓여 먹을 것처럼 굴었지만, 이사오며 어쩌다 들인 얼음정수기의 편안함과 신선함에 하루 만에 굴복하고 가족 모두가 제일 잘산템으로 입을 모으고 있는 것만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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