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먹으면 집밥
바야흐로 집콕의 시대.
아니, 그 옛날에는 가족들 친구들 전부 우르르 음식점에 가서 모르는 사람 옆에 앉아 밥을 먹기도 하고 그랬대! 머지않아 가족 친지들과 모두 함께 맛집에 가서 즐겁게 식사를 하는 일이 삐삐 차던 시절만큼이나 아득한 시절 이야기가 돼버릴 것만 같은 요즘이다. 남편과 딸아이까지 고작 셋뿐인 우리 가족도 저녁 외식을 하려면 주민등록등본을 지참해야 하는데, 서류도 서류지만 집콕이 미덕인 요즘, 그냥 집에서 편하게 먹자가 습관이 된 우리 세 가족이 언제 마지막으로 저녁 외식을 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자연히 집에서 먹는 끼니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나의 늦은 퇴근을 핑계로 또 주말이면 맛집으로 힐링한다는 핑계로 외식이 잦던 우리 집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일단 늘어나는 설거지산에 식세기 이모님이라 칭송받는 식기세척기를 구매했고, 근처 포장과 배달 맛집을 동네 친구들과 나누는 게 일과가 되었다. 잘하진 못해도 요리하는 걸 좋아하긴 해서 주말이면 딸아이와 함께 재미 삼아 이것저것 만들어먹긴 했었지만 밑반찬을 만들어둔 적은 없었는데, 일요일이 되면 주중에 먹을 반찬들을 한두 개씩 만들어 놓게 되었다. 그래도 퇴근하면 7-8시가 훌쩍 넘는 평일에는 여유롭게 식사 준비하는 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쉽지 않았고, 각종 배달앱은 핸드폰 메인화면에 자리 잡았다. 밀키트도 새로운 대안이 되었는데, 줄 서서 먹던 맛집의 시그니처 요리가 코로나 시국에 발맞추어 밀키트로 탄생한 것을 발견하면 은혜로운 마음마저 들었고, 그 안에는 필요한 채소들까지도 한 번 쓸 분량만 포장해서 준비되어 있으니 자꾸만 남는 재료로 골치 아플 일도 없어 좋았다. 직접 가서 먹던 그 맛까지는 아니어도 추억을 소환하는 맛있는 한 상에 즐거워졌다. 그렇게 투고와 배달, 엄마표와 밀키트의 믹스매치로 코로나 시국의 주부생활에 나름 현명하게 적응했다 자부하던 어느 덥디 더운 여름날 저녁.
늦은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부랴부랴 물을 올리고 냉동실에 있던 광화문 맛집의 메밀국수 밀키트를 뜯어 국수를 삶았다. 저녁인데 국수만으로는 배가 안찰 것 같아 옆에 잠자고 있던 멘보샤도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강판에 벅벅 무를 갈았다. 바쁜 마음으로 휘리릭 차려내고는 딸을 불렀다.
“딸, 밥 먹자! 손 씻고 나와."
"어! 멘보샤랑 메밀국수네, 맛있겠다!"
"그치 엄마가 한 저녁 맛있겠지?"
"응. 근데 이건 엄마가 한 게 아니라, 마켓컬리가 한 거 아냐? 어제 온 게 이거였어?"
10살 딸내미의 팩트 폭력에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도 쏙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퇴근 후 옷도 못 갈아입고 종종걸음으로 준비한 사람한테 굳이 할 소리인가 싶었다. 그럼 뭐 메밀가루로 직접 빚어서 만들어 줘야 엄마표인 건가 어린 딸한테 억울한 마음마저 들어 버럭하고 말았다. "그럼 어떤 음식이 엄마가 한 건데?" 엄마의 냉랭한 기운을 포착한 딸은 금세 "아니, 맛있어 보여서 그랬지." 하면서 멘보샤를 스위트 칠리소스에 푹 찍어 먹으며 맛있는 얼굴을 보여줬다. 익살스러운 표정에 이내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한 번씩 생각난다. 생일이라고 친구들을 초대하기 시작했을 무렵의 어린 시절, 엄마는 내 생일이 되면 오븐에 피자를 구웠다. 얇게 썰어 꽃 모양을 하고 있는 초록색 피망 위에 눈처럼 쌓인 모짜렐라 치즈, 그위에 지그재그 춤추듯 뿌려진 케찹으로 맛 낸 오뚜기 케찹맛 한국식 피자. 일요일이 되면 땡땡이무늬 원피스를 입고 큰 양푼에 메추리알이랑 건포도, 사과랑 당근을 툭툭 썰어 넣고 마요네즈를 듬뿍 버무려 만들어 주었던 과일 사라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 이제 추억의 음식이 되었지만, 엄마가 만들어준 그 국적불명의 요리들은 마흔이 되어서도 어느 날 문득 생각나고, 그 달달한 추억만으로 묘하게 든든해진다. 그래서 딸에게도 만들어주고 싶었다.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에 한 번씩 작은 위로가 되어줄 마음속 온기를. 주말마다 몇 시간 걸려 만든 엄마표 요리에 엄지 척을 올려주면 뿌듯해지고, 연이은 배달음식에는 괜스레 미안해지고, 밀키트로 만든 밥상이 집밥일까 아닐까 고민하며 알 수 없는 켕기는 기분에 사로잡히는 건 아마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심코 한 딸의 말에 버럭 하게 된 것도 결국 내 안의 좋은 엄마 콤플렉스 때문이었음을.
며칠 전, 저녁 먹고 TV를 보다가 TV에 나오던 망고빙수를 보고 "아, 뭔가 상큼한 거 먹고 싶다." 혼잣말을 했다.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딸아이가 내 앞으로 작은 그릇을 불쑥 내민다. 처음엔 깐 마늘인 줄 알고 뭐야? 했는데, 냉장고에 있던 망고스틴을 하나하나 깠단다. "엄마 상큼한 거 먹고 싶다며. 다 들렸어." 하고는 다시 제 방으로 가는 딸을 보며 또 하나 배운다. 꼭 수시간 걸려서 어렵게 요리를 만들어야만 정성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밀키트로 밥상을 차리더라도 사랑을 전하는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