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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Dec 20. 2020

사려니 숲길과 꽁꽁 언 옥수수

낯선 이에게 건네는 친절의 맛


비 예보가 있는 날이었다. 이렇게 날이 흐리건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기어코 사려니 숲길로 향했다. 2010년 여름의 초입, 그날은 내가 사려니 숲길을 처음 걸었던 날이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올레 옮김이를 통해 짐을 숙소로 보내고 버스를 타고 사려니 숲길에 도착했다. 사려니 오름까지 이어지는 숲길을 사려니 숲길이라고 부른다. 사려니는 신성한 숲이라는 뜻으로 이름에 걸맞게 빼곡하게 자리한 나무들이 신비스러운 숲길로 제주도의 축복받은 자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사려니숲길 안내소 입구. 입구를 시작으로 숲길로 접어들면 초반에는 넓고 잘 닦인 길이 나오고, 한참을 들어가야 붉은색의 화산송이 길이 나온다. 깊이 들어갈수록 길은 좁아지고 사람의 흔적은 적어진다. 그리고 자연은 조금 더 존재감을 드러낸다. 타박타박 걸으며 사진을 찍고 멈춰 쉬기도 하며 한참을 걸었다.


 지금은 그런 용기도 무모함도 나이 듦과 함께 사라졌는데 그때는 그 초행길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입구만 걷는 것도, 물찻오름까지 걷고 돌아오는 것도 아닌 숲길 입구로 들어가 붉은오름 쪽으로 나올 때까지 한참을 걸었다. 지금 보니 약 10km 거리. 습하고 비 예보가 있던 날 서른 살의 나는 여전히 용감했던 모양이다.



지도를 제대로 보지 않았고, 거리를 제대로 헤어라지 못한 상태로 무작정 걸었던 길. 금방 나올 줄 알았던 길은 끝이 없었고 지나는 사람의 인기척조차 없어 무서울 만큼 적막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끈적였고 어느 순간 부슬비까지 내렸다. 한 시간이 흘렀고, 두 시간이 흐르자 마치 아마존의 정글을 헤매는 기분이 들 정도로 깊이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길은 제법 잘 닦여 있었고, 여전히 사려니숲길 위에 있었다. 


길을 걷다가 벌 조심 표지판이 나타났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표지판이었지만 그 표지판을 본 순간부터 벌의 윙윙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발걸음을 빨라졌고 이 길을 혼자 오는 게 아니었다면 뒤늦은 후회를 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었다.


마음속에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할 때 숲 쪽에서 제법 큰 소리가 들렸다. 미국의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의 책 <나를 부르는 숲>을 좋아하는데 하필이면 그 순간 그 책 속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것도 곰이나 사자를 마주한 대목이 떠오를게 뭐람. 온통 그곳에 집중된 감각이 두려움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는데 숲에서 나타난 건 예쁘게 생긴 노루였다. 깡충깡충 뛰어 도망가는 노루를 몇 마리쯤 마주하고 나니. 차라리 노루라도 있어서 다행인가 싶었다.


이제는 시간과 싸워야 할 타이밍 어두워지기 전에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걷고 또 걸었다. 물찻오름 입구 쪽을 지나자 길이 조금 친절해진 느낌이 들었다. 붉은색의 화산송이 길이 나오고 키가 큰 삼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는 황홀한 길들이 나왔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모험을 찾아 나선 뒤 시련을 경험하고 깨달음을 얻고 마무리되는 이야기처럼 두려움을 지나고 나니 다시금 아름다운 숲이 보였다.


 나무 데크가 깔린 친절한 삼나무 길이 나오자 마음의 평화도 찾아왔다. 이제 이 길도 끝나겠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얼마쯤 걸어가자 드디어 도로가 보였다. 3시간 넘게 걸어 붉은오름 입구가 있는 반대편에 성공적으로 도착한 것이다.


땀에 젖고 비에 젖어 엉망이 된 몰골로 울고 웃으며 사려니 숲길을 만났다. 아름다웠던 숲을 홀로 온전히 조용하게 마주했지만 내 안에 뿌리 깊이 박힌 두려움도 마주해야 했다. 진이 빠져 터덜터덜 걸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아주머니 두 분이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다.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적당히 떨어져 서 있는데 성큼 다가오시더니 옥수수 하나를 건네주신다. 


걷고 나서 먹으면 맛있다며 주신 옥수수는 반쯤 얼어 있었다. 제주도에 사신다는 아주머니는 종종 숲을 걸으신다고 했다. 일부러 꽝꽝 얼린 상태로 가지고 나와 숲을 걸은 뒤 먹으면 적당히 녹아 있어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이라며 옥수수를 건네주시고 버스를 타고 홀연히 떠나셨다. 


내가 탈 버스를 기다리며 옥수수를 먹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옥수수가 입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피로마저 사르르 녹는 듯했다.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이 달콤함을 만날 수 있었으니 용기 있고 무모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내가 먹었던 꽁꽁 언 옥수수가 맛있었던 건 옥수수의 달콤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낯선 이에게 건네는 친절의 맛. 그 맛이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 뒤로 수많은 옥수수를 먹어봤고, 사려니 숲길을 여러 번 걸어봤지만 그날의 그 감동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삼나무를 베어낼 만큼 세상은 변했고, 누군가의 친절을 선의로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나 역시 변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것. 오늘도 그걸로 위로를 받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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