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thinking cloud Oct 24. 2021
내가 다니는 회사는 관리부에서 경영관리, 총무, 인사 업무를 하고 있다. 즉 관리부 직원이 나밖에 없을 때는 혼자서 다 하는 것이다. 관리부 직원이 혼자인 경우가 중소기업에서는 드물지 않다.
관리부의 업무는 쿨하지 못하다. 생산, 영업, 개발 등과 비교해서 과거에 연연하고 얽매여야 하니까. 특히 자금을 관리하는 회계 업무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고스란히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된다.
오늘은 어제의 자금 사용 내역을 정리해야 한다.
오늘은 지난주의 누적 판매이익을 정리해줘야 한다.
오늘은 지난달의 급여를 산정해야 한다.
오늘은 지난 분기의 부가세 신고 자료를 모아야 한다.
오늘은 지난해의 자료를 결산 신고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경리 직원은 창의력보다 기억력이 중요하다.
현장 소장이 내게 볼트를 하나 내민다. 이거 한 봉지 더 사줘. 보니까 자주 사는 부속이 아니다. 이때부터 미션의 난이도가 올라간다. 볼트의 포장지는 없고 현장에 굴러다니는 볼트들만 해도 종류가 다양한데 비슷하게 생겨 혼란만 가중된다.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이걸 대체 어디서 샀더라?
기억이 안 나면 분석에 들어간다. 이 볼트가 우리 회사의 어떤 제품에 사용되는지를 구매 요청자에게 물어 파악한다. 내가 모를 정도로 자주 안 샀던 부품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제품도 한정적일 것이다. 과거의 볼트 구매 기록을 살핀다. 몇 개의 업체로 추려진다. 자금 사용 개요를 훑는다. 제품과 용도가 같은 구매 기록이 있다. 미션 클리어.
이런 식으로 늘 과거를 쫓을 일이 많다 보니 뭐든 기억이 안 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결국 출처를 밝히지 못한 경우 “이거 네가 샀잖아.”하는 말을 듣는다.
그게 사실... 카드는 제가 드린 게 맞지만 실제 구매는 구매 담당자가...... 내가 생각해도 구차해서 말 안 하고 만다.
나의 메모 습관은 이런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겼다. 컴퓨터 메모장이든 자금 일보의 비고란이든 포스트잇이든 닥치는 대로 적고 본다. 나이가 들수록 더 필요한 습관이 되고 있다. 처리 완료된 메모를 구겨 버리는 만큼 일이 줄었나 하다가도 그만큼 더 붙은 메모를 보며 질량 보존의 법칙을 떠올린다. 내게는 업무량 보존의 법칙이라 해야 맞으려나.
가끔 개발부나 기업부설연구소 같은 부서를 바라본다. 회사의 미래는 개발부에서 나온다. 시행착오나 생각지 못한 공정의 어려움 등 개발부의 스트레스도 만만치는 않지만, 앞으로 생산할 제품은 현재에는 없는 것이니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개발부가 써댄 자금의 내역이 생소하다. 새로운 업체에서 모르는 기계와 자재를 샀다. 그러면 나는 추궁한다.
- 개발품 관련 경비는 용도를 명확하고 자세하게 쓰세요. 안 그러면 카드 안 줄 거예요!
미래 쟁이가 한바탕 저질러 놓은 어제를 정리하면서 과거 쟁이가 부리는 작은 심술이니 이해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