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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Mar 17. 2024

삶에 진저리 치는 이들에게

 오늘도 회사에서 번뇌했다. 

쳐내는 일은 월급 오르는 만큼 줄어들고, 쌓여가는 일의 양은 복리로 늘어났다. 끊이지 않고 들리는 대화 소리와 전화벨 소리. 내 생각은 소란스러움 속에서 심연의 고요함을 찾아다니는 외톨이 같아 보였다.


주변을 둘러본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 내 표정만 일그러져 있는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표정이 되지 않도록 얼굴 근육 매무새를 다듬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이미 거대화된 조직을 더 배 불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이 맞는 일일까? 올바른 일인가? 반대가 되어야 정상적인 것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얼마동안 더 시달렸을까. 여기저기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윽고 인기척이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일을 다한다는 말이 애초부터 무색한 이곳에서 퇴근은 물리적인 시간의 채움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곳이다. 차라리 마음 편하다. 어떻게든 시간만 때우면 퇴근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얼마 후 나도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아직도 퇴근 못한 몇몇 이들이 보였다. 나는 가식적인 미안함 몇 마디를 남겼다. 마음속에 거의 남지 않은 죄책감과 그간 억눌렸던 자유에 대한 갈망이 한데 뒤섞인다. 퇴근은 마냥 기분이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내일 있을 회의와 프로젝트 준비에 고개가 떨구어진다. 


터덜터덜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회사 담벼락 쇠창살 사이로 이름 모를 가지들이 손을 뻗쳐있다. 무언가 요청하는 기분이 들어 짠하다. 나는 그냥 지나쳐도 괜찮을 퇴근길이지만, 소심하게 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로 응했다.


퇴근길 차 안, 집 근처 횡단보도 앞 정지선에 섰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대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꼬마 아가씨 두 분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널 채비를 하고 있었다. 꼬마아가씨들은 차가 많은 사거리가 무서웠던지 할아버지 손을 잡은 채 매미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나는 혼자 피식 거리며 아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한 손으로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끌고, 한 손은 번쩍 든 채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끌려가시면서도 껄껄 웃으시는 소리가 내 귓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순간 회사에서 느꼈던 오만가지 잡생각이 씻은 듯 녹아내렸다. 


이보다 더 값진 장면이 있을까? 세상 온갖 풍파 다 겪어본 사람만 지을 수 있는 특혜 같은 웃음이었다. 파여있는 주름과 순박한 미소에서 세상만사 삼라만상의 진리를 보는 순간이었다. 조막만 한 아이들의 손에서 살겠다는 의지와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떤 희열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그래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진저리 치는 하루를 살다가도, 사소한 듯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존재들과 마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웃음이 났다. 원래 죽도록 힘들지만 이런 거 찾으면서 살면 된다는 말 같았다. 이런 생각이 상처에 바르는 빨간약 스미듯 내 걱정 위에 스며들었다.


글을 쓴다는 행위가 산다는 것과 묘하게 닮아있다. 구태어 쓰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지 않은가. 나는 그냥 걸어도 힘든 길을 왜 글과 함께 가려는지 궁금했다. 퇴근길 할아버지의 미소와 꼬마아가씨들의 주먹을 보듯, 글쓰기도 억지로 삶을 복기하다 보면 깨알 같은 행복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글 쓰다 마주하게 되는 사유의 속삭임이 좋은 것 같다. 나에게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살아갈 수 있음에 고마움을 촉구하는 것 같다.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감각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그냥 지나쳤던 사물에게도 전혀 색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들어 글 쓰며 하찮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항상 좋은 의미만 부여하지 않으니, 눈물이 많아졌다는 말이기도 하겠지. 의미 없이 살더라도 쥐어주는 세월의 야속함 탓일까. 아니면 세상에 글이라는 렌즈를 대보며 세상과의 접점을 넓혀가고 있다는 증거인 걸까?


무엇이 되었든 중요치 않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솔직하면 되는 것이니까.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감각을 쥐어준 글쓰기에 감사할 따름이다. 고생도 고통도 일상에서 길어 올리면 하루를 살게 하는 묘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아는 눈치다.


오늘따라 차 정면으로 해가 너무 들어차는 것 같다. 눈이 부셨다. 따스한 기운이 맴도는데 눈에만 머무는 것을 보니 또 무언가에 감흥하고 의미를 부여했구나 싶다.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끌려가는 어르신을 본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분명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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