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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9시 30분

by 눈 비 그리고 바람

금요일, 저녁 9시 30분.

비척비척 걸어 현관 입구로 들어섰다. 저 멀리 유리문에 내 모습이 어렴풋하게 비친다. 한쪽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쳐진 모습. 어깨에 메고 있다기보다는 가방이 나를 매고 있는 듯 휘어진 모습이다. 두툼한 노트북 가방은 다리와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소리가 신경 쓰였다. '처량 처량' 하는 소리가 발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고개를 젖히며 층수를 쫓던 나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희끄무레한 엘리베이터 문에서 내 전신이 어렴풋이 비쳤다. 문득 내 모습이 궁금했지만 볼 수 없었다. 저녁도 먹지 못해 초췌하거나 처량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가족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까 생각하니 조금 두려움도 밀려왔다. 다시 어깨를 쳐들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들어가면 멀쩡한 척 보일까?


“에이 관두자, 그럴 힘이라도 있나”


체념에 한숨소리가 공기를 가르자 마음은 더욱 공허했다. 덩달아 엘리베이터 문틈에서도 눅눅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앞머리가 나부끼자 머리칼 곳곳에 들어찼던 시원함이 묻어났다. 그 시원함 덕분에 어딘가 숨어있던 감각이 되살아 났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바람냄새가 났다. 곰팡이 냄새가 옅게 서려 있었지만 풀내음 같기도 했다. 충분히 상쾌했고 시원했다. 무채색으로 둘러싸인 벽과 쇠덩이, 심지어 땅속임에도 숲 속에 온 것 같은 평온을 느낄 수 있다니. 묘한 감각 때문에 오히려 나 자신을 의심했다. 충분히 소진된 상태라 그럴 수 있다며.


마음대로 생각을 바꾸는 상상을 한다. 스위치 하나로 직장에 있던 일을 모두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치 보며 회사 흉을 더 자주 봐야 하는 가족과, 거기에 생색으로 답해버리는 온전치 못한 자신과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현관문 앞에 섰다. 오늘따라 퇴근이 늦었던 나는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잠시 고민 중이다. 힘든 척하고 들어가 거드름을 피울 것인지, 아니면 아무 일 없는 척 들어가 신나게 웃어버릴 것인지를. 안면 근육이 갈팡질팡 하던 사이, 철문 너머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빠가 오시면 숨어서 놀라게 하자며 딸아이와 와이프가 모의 중이었다. 딸아이의 물방울 같은 목소리가 하도 생생해서 무심코 대꾸할 뻔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내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분명 아빠 미소임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하며 누구보다 놀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오늘따라 더 천천히 그리고 누를 때마다 “삑삑” 소리가 더 멀리 퍼져가길 바랐다.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다. 아빠 오셨다며 작고 다급하게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니 안방 화장실에 숨으러 가는 게 분명했다. 슬며시 웃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집 안에는 좀 전까지 음식을 하던 맛있는 냄새와, 딸아이에 로션 냄새가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소란스러운 고요함을 만끽했다. 어디선가 쿡쿡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생각을 전환하는 스위치는 이미 현관 비밀번호로 눌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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