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인격 내담자
상담을 받으면서 우울에 잠식되는 날들이 더 늘어났다. 그 전에도 우울하지 않은 날보다 우울한 날들이 많았지만, 굳이 비교해 보자면 인식하는 정도가 달라졌다랄까.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는 과거의 사건들로 돌아가는 때면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누군가를 만나서 카페에 들어가 정신없이 수다를 떨거나, 운동을 하거나, 좋아하는 영화나 귀여운 동물 영상을 찾아봤다. 트라우마들과 안 좋은 기억을 내 삶에서 치워버리기 바빴다. 상담에서 나는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나를 비난하지 않는 조력자와 내 과거를 마주하는 과정들을 밟아왔다. 내 인식의 오류를 정정하고 내 잘못이 아니었음을 설득당하면서,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기보다는 오히려 바닥으로 깊숙이 잠겼다.
내 잘못이 아니면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거지? 나아지지 않으면 죽음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
잠깐 기쁘고 마는 거 아니야?
상담 시간 뒤 짧으면 몇 시간, 길면 며칠 간격을 두고 내 기분은 바이킹을 탔다.
이렇게 나를 이해해 주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배려를 담아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샘솟다가도 이 사람이 뭔데 나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냐며 반감이 속에서 치고 올라오기도 한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건 넘실대는 기억의 파도에 나를 밀어 넣어 놓고 선생님은 그저 뭍에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지시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가라앉는 내 몸뚱이를 밑에서 떠받쳐 주기를 바랐던 나에게는 이 모든 게 아무 소용없어 보였다.
해상구조대원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요구조자의 앞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패닉한 당사자가 구조대원에게 매달리거나 올라타려 해서 둘 다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구조대원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뒤로 헤엄쳐 가 목 부근을 끌어안고 물 밖으로 끌고 나온다. 여느 때와 같이 내 존재 자체에 의문을 던지면서 이 효력 없어 보이는 시간들만 탓하고 있다가 퍼뜩 떠오른 것이었다.
아, 선생님은 구조대원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 형태나 방법은 다르지만, 앞에서 직접 꺼내 주려고 하다가는 둘 다 가라앉아 버릴 수 있으니 더 효과적인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기적으로는 당장 나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드는 게 위안이 될 수 있지만 장기적 자립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찌 됐건 상담자와 내담자는 함께 위험 요소를 끌어안고 숲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 같다.
나는 또 이 글을 쓸 때는 ‘역시 상담 선생님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야! 어떻게 나같이 힘든 얘기를 매일 들으면서 견뎌내지?’ 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으면서 얼마 뒤엔 믿을 사람 하나 없다면서 이중인격 같은 존재로 돌변할지 모른다. 그래도, 매사에 부정만을 일삼던 내가, 좋은 면, 따뜻한 면을 보려는 시간을 갖게 됐다는 것도 한 발짝 나아갔다고 생각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