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주한
잊고 있던 것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몇 주 지난 일이지만, 여러 젊은이들이 죽음을 목도한 사건은 여러 해 전 학생들이 바다로 가라앉은 이후 나라 전체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원치 않는 죽음. 사고. 그래 사고가 맞는 말이다.
이전 4월에도 이번 가을에도 죽음에 대한 애도는 떠난 사람들과 관계없이 변질되거나 왜곡되기도 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고 의견이 분분함 또한 막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죽음을 그들의 잘못으로 몰아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진이나 해일처럼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는 피해를 입은 자들을 질책하지 않는다. 지진이 일어난 장소에 왜 있었냐, 왜 무너지기 쉬운 곳에 있었나, 왜 그 지역에 살았나, 왜 그 나라 사람인가, 왜 태어났는가? 결국 자기 존재까지 스스로 의심하고 의심 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살던 어릴 때가 기억난다. 우리집도 옆집도 윗집도 여름이면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고 햇빛과 모기를 막기 위한 나무 냄새나 음식 냄새가 벤 창 가리게만을 세상과의 사이에 두었다. 출근하다, 학교가다 마주친 이웃에게 밝게 인사를 건낼 수 있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젠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이 무서워 서로 조심, 조심, 조심하다가 어떤 따뜻함도 느끼지 못 하는 지경에 이르른 것 같다.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나는 4년 동안 내 목을 감고 있는 쇠고랑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리고 나름 성공했다. 짧은 상담치료와 운동과 동아리 활동들. 결국 모두 사람들과 함께였다. 사람이 무섭고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아서 집에 틀어박혔던 시간들을 돌아보면 그 안에서 난 절대 혼자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밥 먹자고 부르는 친구와 명절 때 모이는 가족, 친척들. 해내야 하는 과제, 활동. 내게 지워진 기대와 책임. 모두 버려도 상관 없다는 생각으로 죽음까지 그렸는데 이제오니 무엇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었다.
박약한 의지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는 자책감에서 한 발짝 나오니 주변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여전히 인간관계는 어렵고 나에 대한 믿음도 작지만 그래도 혼자는 아니니. 척척한 비가 오는 날 커다란 여행 트렁크를 우산 없이 끌고 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줄 수 있는 사람, 그게 나였으니 그 따뜻한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