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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 Mar 24. 2023

나는 호구였나

이전 글에 이어진다.


한 번 다른 사람한테 너 호구 아니냐는 말을 들으니 지금까지 모든 상황들이 나를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듯 했다. 입 밖으로 나온 형태 없는 소리들은 정말 큰 힘을 가지고 있다.

비단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주변을 맴도는 파장에 영향을 안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좀 더 성인에 가까운 무엇이 되니 이런 경향이 더 커진 것 같다. 칭찬 한 마디에 웃고 망설임 가득한 사과에 굳은 얼굴을 풀던 어린 시절에 비교해 지금은 칭찬이든 사과든 뭐든. 나누기 어려운 세상이 있다는 걸 알지 않았나.

*에 대한 소문 따윈 알 바 아니던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적어도 나나 *와 내 사이에 겹치는 지인, 친구들보다야 객관적일 것 같은 대학 동기들 말을 들으니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다.

우리 집이 아주 풍요로운 것도 아니고 알바를 2, 3개씩 해 가며 돈을 모으는 것도 아니지만, 작은 거라도 꼭 챙겨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챙겼다.

이건 내가 고치고 싶어하는 내 성격이기도 한데, 일단 나는 내가 대가를 바랄 것 같으면 그러니까 내가 준 것에 대한 보답을 원할 것 같은 사람이면 애초에 그리 가깝게 두지 않는다. 돌려 생각해보면 몇몇을 빼고는 내 바운더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주 많지는 않다는 거다.


초중고대 학교 생활을 하며 친하게 지낸 사람들은 밥 한 번 사주면 밥 한 번 사주고 하는 사이였다. *를 제외하고는.

그 왜 있지 않은가. 꼭 사야할 것 같은 자리는 피하면서 누가 친절을 베풀면 그 기회는 놓치지 않는, 얌체같은? 내 친구는 그런 사람들과는 좀 달랐지만 결국 내 이미지는 호구처럼 비춰졌나보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무슨 날이면 이거 사줘 하는 것들을 사다줬고, 알바를 일주일 중 5일을 하는 걸 알면서도 돈이 없다는 말에 밥부터 영화까지 풀 코스로 대접했던 지난 날들이 난 억울하지 않았었다. 이 정도면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냐는, 적어도 뭐라더라 겉으로 데리고 다니는 애인 정도? 뭐 말이 있었는데.. 하여튼 그런 사이 아니었냐는 말에 친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며 부정하는 나를 보며 점점 지난 날에는 느끼지 못하던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알바나 과외를 하며 생활비+여윳돈이 생기면서 또 돈 많이 드는 술자리를 돌아다니면서 씀씀이도 당연히 용돈 한달에 5만원 받던 고3 때보다는 훨씬 커졌다. 그러면서 내가 *에게 쓰는 돈도 액수가 커졌는데.. 둘이 혹은 같은 동창을 하나 둘 껴서 술을 먹으면 10만원은 거뜬히 나왔다.


알바비가 들어왔다, 장학금을 꽤 받았다는 말을 대화중에 꺼내면 뭐라도 사야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 병이 있어서 ㅎㅎ 그냥 그런 날엔 기분 좋게 사기도 하는 편이었다.

호구 소릴 듣고 보니 그 좋은 기분을 내가 돌려받는 날은 없었다. 정말 찬찬히, 누가 보면 호구새끼가 속도 좁네 할 수 있지만 카톡이나 내역들, 그리고 오래된 기억들을 쭉 돌아봐도 밥 한 번 얻어먹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사거나 n빵 하거나.


아 한 번 있다. 그 친구 생일 때 집에서 치킨 피자 시켜먹은 건 얻어먹었다. 이런 거 하나하나 다 따지는 순간 그 관계는 전으로 돌아가기 힘들다던데 맞는 말이었다.

생일 하니 생각나는 건 부모님끼리도 친한 사이라 부모님 생신 때 케익이라도 같이 먹으라며 엄마가 5만원을 쥐어줬는데 그걸 아무 말 없이 먹었던 사건이다.

나중에 축하겸 궁금해서 케익 맛있게 먹었냐고 물어봤다가 모두가 당혹스러웠던 그런 날이었다. 이 일이 그 친구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이 일 말고도 10여년 동안 여러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다. 내 동생은 삥도 뜯기고 같이 먹은 쓰레기를 항상 나만 치우고, 자기 집까지 데려다 줘야 된다고 날 애완견처럼 끌고 다니던  학창 시절과 정말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을 옆에서 내 일처럼 도왔더니 한 마디 고맙다는 말이 없었던 것. 나열하기도 힘들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호구가 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런데 사이에 쌓인 시간 말고는 성격이나 삶에 대한 태도, 가치관까지 하나하나 맞는 게 거의 없던 *는 내 인간관계에 있어서 정말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하여튼 호구잡히지 않으려는 노력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 당시에도 *는 시간되면 계속 만나자고 하는 상태였으며 나는 끈질긴 연락을 갖은 핑계로 피해다녔다. 코로나 때문에, 시험기간이라, 동아리 활동 때문에 등.

그러다가 위에서 잠깐 언급한, 맨정신으로 과거 기록들을 뒤졌을 때 나는 고마움을 느낄 일이 정말 별로 없었고 내 개인적인 고민이나 이야기를 편하게 해 본 적도 없다는 걸 깨달은 날이 있었다. 호구에 이은 색다른 충격이었다. 과연 얘는 나를 진짜 친구라고 생각한걸까? 그때까지도 그냥 내가 편하니까 잘 해주고 잘 사주니까 그냥 좋다~하고 넘어가는 *의 성격일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이걸 다 알고 매번 나를 지갑처럼 보며 만났을 거라는 생각은 ‘호구라니!’ 뒤에도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그렇게까지 우리 추억을 파버리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의심을 또 시작한 순간 눈이 돌아버렸다. 진짜 이 새끼도 날 호구라고 생각한 것 같아서.


다음은 손절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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