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엘씨 Urban Landscape Catalog는 2020년 1월 창간준비호 『ULC 0 새로운 시작의 시작: 도시 경관의 경계로부터』로 시작해 4년이 넘게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는 조경 분야의 독립 잡지다. 매해 여름과 가을에 각각 정규호와 특별호를 발간하면서 올해로 딱 열 권이 되었다.
조경•설계 분야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유엘씨 프레스는 도시 경관에 대해 새롭고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고자 매 호마다 젊고 알려지지 않은 필진을 발굴한다. 유엘씨가 '밀레니얼' 도시 경관 잡지를 표방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다. 이로써 조경•설계 분야의 전문가부터 연구진, 실무자, 신문 기자, 타 분야 종사자에 이르는 취재원은 이해관계자로서 조경을 둘러싼 담론의 주체로 자리한다.
편집진은 유엘씨에 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유엘씨는 도시 공간, 지역 사회, 조경 관련 산업의 종사자와 연계 학문의 연구자 그리고 도시민을 대상으로 도시 경관의 기능, 특징, 디자인 등 다양한 면모들을 관찰하고 재구성한 매거진입니다. 유엘씨프레스는 이론과 사례, 현상과 비평을 포함하는 글감을 모으고 일상과 발견, 인식과 경험에 관한 영상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출판합니다.”
몇 가지 눈에 띄는 작품을 살펴보자. 2021년 1월 1일에 출간된 『ULC A 팬데믹 도시 기록』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과 도시의 관계를 다루어 보다 대중적이다. 팬데믹에 대응하는 도시 공간의 움직임, 뉴노멀 시대의 공용공간에 대한 제안 등이 담겨있다. 현재는 유엘씨 홈페이지와 교보문고 이북, 그리고 밀리의 서재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ULC 4 나의 조경 연구기』부터 이어지는 ‘조경 연구자-설계가-시공자 트릴로지’는 유엘씨가 가장 최근에 발간한 시리즈 안의 시리즈다. 조경 산업에 종사하는 세 분야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록해 우리에게 익숙한 경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집중 조명한다. 이 중 ‘시공자’ 편에 해당하는 [ULC 6 조경 시공의 최전선]은 여러 형식의 글이 엮인 다른 편과는 다르게 조경 시공자의 인터뷰 내용으로만 집필되었다. 취재원이 직접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집진이 종군기자처럼 조경 시공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쫓으며 취재했다. 매거진을 위한 편집인들의 노고와 조경 과정의 현장감이 유난히 와닿는 편이다.
『ULC B 공공예술로서의 조경』은 문학부터 조각, 메모리얼, 전시, 워크숍에 이르는 다양한 예술 분야와 조경이 이루는 경계를 포착하고 공공예술로서의 조경을 탐구한다. B호는 이로써 조경과 예술 사이에 지속적인 교류의 장을 마련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편에서 유엘씨 프레스는 서울문화재단으로 후원을 받아 전문가와 함께 여러 차례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세미나에 대한 기록은 현재 유엘씨 홈페이지에서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올해 1월에 출간한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는 앞서 발행한 B호와 닮은 구석이 있다. 타 예술 분야를 끌어들여 조경 행위의 예술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편이 B호였다면, D호는 ‘매체’에 나타나는 조경의 모습을 다룬다. 그 때문에 D호는 기존에 이어 작성해 왔던 조경의 기록보다, 여러 도시 경관 매체의 테두리 안팎을 살피고 각 매체를 담당한 필진의 개인적이고 필사적인 역사를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유엘씨는 이를 통해 수많은 매체 사이에서 도시 경관 분야 독립 잡지로서 지니는 의미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았다.
그리하여 D호는 유엘씨라는 독립 잡지가 처음 제작되었던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첫 목차 <Editors>에선 유엘씨 편집진 세 명이 유엘씨의 과거와 탄생기, 기획 비하인드를 각자의 관점에서 풀어낸다. 유엘씨의 초창기 움직임을 세세하게 설명하면서도 무언가 넋두리 같은 느낌으로 D호의 시작을 열고 있다. 잡지 시장에서 유엘씨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삽입한 자조적인(?) 그래픽이 웃겼다.
본문 28면
이어지는 목차 <Landscape>에서는 유엘씨는 잡지 시장에 포진해 있는 건축•조경 분야의 주류•독립 잡지의 출판 동향을 두루 살피고 다시 자신만의 섬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다른 독립출판물과의 공유하는 독특한 정체성을 ‘위태로운 자아’로 설명하거나 카탈로그에 담긴 뜻(은 홈페이지에 앞서 설명하긴 하지만)을 풀이하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본문 28면(왼쪽) / 본문 40면(오른쪽)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Medium>엔 조경을 다루는 각종 매체의 종사자들이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책이나 글, 사진부터 비교적 낯선 분야인 전시, 논문, 번역, 구술 채록, 작품집까지 포함되었다. 필진은 에세이를 통해 각 매체가 조경을 대하는 태도를 조명하고 그 과정에서 인문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왼쪽의 사진은 ‘전시’, 오른쪽의 사진은 ‘작품집’이다. 필진은 각 매체의 특성과 관련지어 조경의 의미를 끌어내고 있다.
본문 71면(왼쪽) / 본문 92면 (오른쪽)
마지막 목차 ‘Roundtable’에서는 유엘씨의 편집인이 초청 게스트와 유엘씨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주제로 진행한 회담을 기록한다. 이 목차는 조직 내부에서 긴밀하게 논의될 만한 미래의 계획까지 다루고 있어 가장 개인적이고 깊이 있는 얘기를 엿볼 수 있다.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정기 간행물로 발행하는 것은 상업성이 우선인 대형 출판사의 출판물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는 이렇듯 유엘씨가 조경 독립 잡지의 한계와 가능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담았다. 때로는 자조적인 농담을 섞어가며 글을 써 내려갔지만, 무엇보다 유엘씨를 4년간 제작해 왔던 편집인의 열의가 돋보였던 편이었다.
출판 디테일 리뷰
1. 표지 디자인 / 내지 편집
주간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육배판이다. 꽤 빳빳한 백색 모조지가 사용되어 책을 쥐거나 페이지를 넘길 때 부드럽기보다 묵직하고 단단하며 조금은 거친 느낌을 준다.
유엘씨의 표지는 열 권이 발간될 동안 그 고유성을 유지해왔다. 선과 면, 직선과 곡선, 글자와 글자 사이의 연결 관계가 돋보이는 로고는 앞표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호가 발행될 때마다 로고의 면 부분을 채우는 색이나 효과가 새로 디자인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 꿋꿋한 디자인이 어딘가 학술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마 서점 책장에 꽂힌 모습을 보면 실제보다 전문적인 서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
로고와 함께 매 호마다 변경되는 배경색은 주로 원색보다 낮은 채도의, 마치 잿빛 도시를 연상케 하는 색들이 사용되었다. 표지에 눈에 띄도록 사용된 디자인 요소는 로고 뿐이지만, 매 호마다 배경과 로고의 디자인을 새로 조합해 내면서 각 호의 주제를 나타냄과 동시에 시리즈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내고 있다. 예를 들어 ULC 0호의 표지는 도시경관 잡지의 창간준비호에 걸맞게 로고와 배경이 각각 자연과 도시를 나타내는 듯 보인다. 한편 팬데믹에 맞춰 특별편으로 기획된 ULC A는 로고 안에 바이러스 이미지를 삽입함으로써 ULC 표지 디자인의 유연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ULC 0: 새로운 시작의 시작: 도시 경관의 경계로부터 (왼쪽) / ULC A 팬데믹 도시 기록 (오른쪽) (유엘씨프레스)
내지에는 텍스트 위주의 흑백 인쇄가 돋보인다. 백색 모조지를 내지로 사용해 흑백의 대비가 뚜렷하다. 심지어는 도시 경관을 담은 사진도 흑백이다. 이런 직관적인 디자인과 편집 양식이 도시 경관의 쭉 뻗은 직선과 닮았다. 독립 출판의 적은 예산을 고려한 효율적인 방식이라고도 한다.
본문 68면
2. 홍보 및 마케팅
유엘씨프레스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브런치,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 출간 소식이 게시된다. 유엘씨프레스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각호와 관련한 추가 콘텐츠를 볼 수 있기도 하다. SNS에도 각호의 발간 과정과 관련하여 더 다양한 소식이 업데이트된다면 좋을 거 같다.
조경 매체 기자와 같은 조경업 종사자는 잡지의 소비자인 동시에 각호에 참여해 콘텐츠를 만드는 생산자로서 유엘씨프레스와 직접 원고 청탁을 주고받기도 한다. 유엘씨프레스는 이렇게 이해관계자들을 창작에 끌어들이는 방식뿐만 아니라, 크라우드펀딩같이 독자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 좁지만 충성도 있는 소비층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유엘씨는 도시의 공간과 그 안에서의 인간 활동을 기록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도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사진을 넘어서, 도시 공간의 복잡성과 그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인간의 경험을 포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잡지는 복잡하고 얽힌 도시의 공간을 단순히 '보는' 것에서 벗어나,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 활동과 그 의미를 '읽게' 만든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이 시도를 4년 동안 이어간 유엘씨는 조경 독립 잡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about dmz』 『요즘도시』 『도만사 매거진』 『아키라우터』 같은 건축•조경 독립 잡지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는 유엘씨가 떠나온 여정의 쉼표에 해당하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설적으로 여기서 독립 잡지를 탄생시켰던 최초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 D호에 고스란히 담긴 편집진의 고뇌가 독자와 공유하는 새로운 대지로서, 독자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주는 소중한 자산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