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좋은 개 살구
지난 12월 행복했던 학생신분이 끝난 후, 곧바로 부족했던 배움을 보충하기로 했다. 온라인 강좌를 등록하고, 매일 밤 늘 그랬던 것처럼 두세 시간씩 새로운 배움의 시간을 투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귀한 내 돈이 출금되었고, 매일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제는 투자한 만큼 거두어 들일차례.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입금으로 증명해 볼차례.
돈 벌어서 남줄 차례.
매일밤 구직활동을 하며, 이력서를 이곳저곳에 넣어본다.
크리스마스 휴가기간이 (한 달가량) 오기 전에 ( 뉴질랜드는 이 기간이 되면 거의 모든 일들이 멈추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서둘러 이력서 넣는 경험을 쌓고 싶어, 키워드가 걸리는 곳마다 신청을 해보았다.
멀티플레이어로서 (엄마, 학생, 아내, 알바) 멘탈을 붙잡아 놓기 위해 조금씩 꾸준히 이어나갔던 글쓰기와 책 읽기. 사실, 침대에 피곤한 몸을 맡기기 위해서는 제치고 싶었던 일순위 일들이었지만, 이 활동들은 나를 이끌어 주었고, 성장시켜 주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좀 더 주어졌으니 마음 편히 글쓰기 계획을 세우고, 저장글을 늘여나갔다. 슬로리딩으로 집중해 볼 책을 선정하고 천천히 글을 읽고, 필사를 했다.
공부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취미로 삼을 만한 즐거운 일이 생겼었다. 이젠 시간을 두고 골방에 박혀 그리는 일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종이와 그리는 도구들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고 골방을 스튜디오로 만들어 세팅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아마도 한국에서 오는 손님맞이 이후의 일이 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설레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은 2주간 잘 지속되었다.
이대로만 꾸준히 한다면 구직활동을 하는 기간 동안 자존감이 떨어질 일도, 기다림에 지칠 일도 없이 스스로를 꾸준히 성장시키는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할 것 같아 신이 났다.
엄마가, 남편이, 친구들이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나를 쉬게 하라고 했다.
하루종일 늘어져 드라마나 실컸보며 게으름 피우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나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날 예전 방식대로 쉬게 해 주어야 하는 걸까.
나에게 쉼이란 무엇일까.
이제는 글 쓰며 생각을 털어 정리하고, 그림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뇌를 쉬게 하는 일들이 좋은데 그것은 쉬는 게 나로서는 쉬는 게 아닐까.
아직도 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 틀림없는 나는, 3주 후면 한국에서 오는 시월드의 상황에 나를 둬 본다.
한 달가량 손님을 치러야 하니 나의 시간들은 없다고 본다.
피곤함을 이끌고 가이드 역할을 하는 나,
삼시세끼 음식장만하는 시어머니 옆에서 거드는 나,
주야장천 빨래와 설거지를 해야 하는 나를 떠올리고 보니
몸이 원하는 대로 뒹굴뒹굴해주어야겠다는 합리적인 잘못된 (?) 선택을 한다.
낮에는 손님맞이 대청소, 음식 쟁여 두기
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기
정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먼지 투성이 액자들, 옷장의 옷들, 이불들도 모조리 꺼내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의 기한 지난 음식들 또는 그렇지 않은 음식들, 소스 통들을 모조리 꺼내 정리를 하고, 바닥과 천장의 묶은 때와 벌레의 흔적도 물티슈로 박박 닦아냈다.
아무리 청소를 해도 주택은 표시하나 나지 않지만 , 그래도 묶은 때를 배겨주니 좋아 보였다.
한국사람들이 오니 밑반찬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밑반찬을 만들고, 배추김치 오이소박이를 작은
통에 담가 냉장고를 채웠다. 이 음식들은 어쩌면 사람의 몸속이 아닌 곳에서 잘게 부수어져 소비될지 모르지만 일단 성의를 보이기로 했다.
낮에는 집안일과 손님맞이를 위한 음식장만을 했으니 밤에는 뒹굴기를 할 차례다.
뒹굴기는 마음이 불편하다.
구직 활동을 해야 하는 압박감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가면서 재미있어 보이는 한국드라마를 정주행 해본다.
구직자의 죄책감은 오간데 없고, 드라마에 빠져드는 구직자다.
다음날. 구직자는 우울감에 빠진 채 집안일을 한다. 어제는 한 군데도 이력서를 넣지 않았기 때문이고, 연습 삼아 지원해 본 회사에게서는 연락두절이 거나, 거절의 이메일을( unfortunately로 시작되는) 받았기 때문이다.
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죄책감에 빠진 구직자는 뒹굴거린 지 며칠 되지 않아, 몸을 일으키고 구직활동에 다시 나선다. 역시 구직활동을 하는 것이 드라마 보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다.
몇 군데 지원해 볼만한 회사를 선정하여 지원서를 작성하여 보내보았다.
한 회사에 지원하는 한시간이 가량이 소요된다.
회사가 원하는 사람으로 보여야 해야 하는 문장을 구성해야하고, 키워드 맞춰 써야 하고, hiring manager 이름도 찾아 써야 하고 등등... 한국에서 알바구할때 대충 썻던 이력서와는 참으로 다른 이력서를 매 회사에 맞춰 쓴다. 좀더 신경을 써서 보내야 할것 같은 아쉬움과 찜찜함을 뒤로 하고, send 버튼을 누른다.
사실 지금껏 지원한 회사는, 걸려도 다닐 수 없는 다른 도시에 위치한 회사, 대기업, 젊은이들이 신청할만한 그레쥬에잇 프로그램.. 그런 곳들이다.
내일이면 시월드가 시작된다. 구직자는 마음이 편해진다. 구직활동을 쉴 좋은 핑계가 생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