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새해가 되었다. 그리고 난임 생활 3년차라는 씁쓸한 상황에 놓인 내가 있었다. 계속되는 실패가 ‘내 인생에 과연 아이가 있기는 한 건가’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몰고 왔다. 사람을 만나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아져 폐쇄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먹는 것, 운동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니 내 몸 자체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번이 아니면 진짜 포기하겠다, 대신 이번엔 그 전의 실패를 곱씹지 않고 그냥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여기까지 하고 나면 더 이상의 아쉬움도 남지 않을 거 같았다.
사실 새해에 들어서자마자 난임병원을 가야 하는 상황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또 한 번 담당의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병원 예약을 잡았는데 다시 병원이 가기 직전까지 망설였다. 막상 난임 병원에 들어서면 덤덤해진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으므로. 물론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아 자연임신을 하는 행운을 얻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아이를 기다린 사람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나는 평균 정도이지 않을까 그냥 나 혼자 위안을 삼으며 그 공간 안에 자리 잡았다.
한 시간 동안의 긴 기다림 끝에 의사 선생님을 만나, 이전의 나의 진료기록을 내보이고, 궁금한 걸 여쭤보았다. 선생님께선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하셨고, 그 방법은 내가 여태까지 겪어왔던 것들 중 가장 힘든 방식이었다. 그건 바로 배란을 억제하고, 내 몸 안의 호르몬을 약으로 컨트롤하는 것. 약을 훨씬 많이 먹고, 이식 전부터 하루에 두 개씩, 임신 9주차까지 주사를 맞아야 했다. 거기다 면역을 낮춰주는 비싼 면역글로블린이라는 주사도 맞아야 했다. 지금까지의 방법들이 실패했기에 이렇게 시도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내 몸과 가정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며 망설이기를 잠깐. 마지막이니까 뭐든 해봐야지라는 생각이 다시 내 머리를 스쳤다.
첫 진료 이후 나는 계속 배란을 억제하는 호르몬 제재의 약을 하루 3번 일정 시간에 맞춰서 먹어야 했고, 그 다음 주엔 주사가 더 추가되어 매일 아침 동네 병원에 들러 엉덩이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 병원은 일반 산부인과였기에 임신을 한 상태로 오는 사람이 많아서 더 위축되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임신 여부에 관심이 없었지만, 괜히 다른 사람이 들고 있는 임신부 수첩을 보면서 ‘나도 언젠간 진료를 볼 때 저 수첩을 내밀 수 있겠지’라는 희망, 이렇게 매일 주사를 맞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과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그 짧은 시간 안에 스쳐 지나갔다.
설 연휴에도 시댁에 가지 않고, 집에 남아 매일매일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연휴 마지막날 이식을 하고, 조상신이든 하느님이든 누구든 나 좀 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렇게 10일 뒤, 피검사를 하기 직전에 속옷에 피가 뭍어 나온 걸 확인한 나는 이게 생리라 확신하고 절망에 빠진 채로 병원에 갔다. 피만 뽑고 얼른 병원을 나왔는데, 오후에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는 임신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이틀 뒤 수치도 안정권이었고, 이전에도 그랬듯이 아기집도 확인했다. 하지만 여전히 피는 나오고 있었고 내 마음은 하루에 몇 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