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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 대한 놀라움을 회복하는 일하는 손가락

2019년 <초록엄지-일의 즐거움>전시에 관하여

김도희, 체온을 닮은 산, 2019


현대사회는 일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 여가를 사며 일로 소비한 시간을 위로한다. 일자리를 찾아다니면서 일은 찾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직업에 대해서는 가르치나 평생 ‘일’을 하게 될 것이라 이야기하지 않는다. 직업을 점유할 것인가 일을 향유할 것인가라고 묻는 『일철학』 책의 저자가 근대의 노동관에서 벗어나 온전한 일의 정신성을 갖춘 사람들이 선도해갈 시대를 앞두고 있다는 말처럼 가까운 미래사회 일상을 지배하는 일의 영역에서 그 원형을 돌아보고 변화의 방향성을 예측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김도희, 체온을 닮은 산, 2019


김도희, 수확 이후의 수확, 2019


일의 성과를 위해 자기자신을 착취하기까지에 이른 과잉과 분주함의 시대를 ‘피로사회’로 표현한 철학자 한병철은 근간 『땅의 예찬』에서 정원일의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에덴정원에서 신이 준 축복의 일부였던 일이 그 본래적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 정원에서의 일 개념은 일하는 인간의 삶을 어떻게 회복시켜주는가? 이 전시는 정원사의 손에 주목한다. 모니터 앞의 작은 손가락으로 축소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목도하며 정원사의 초록으로 물든 엄지, 그 일하는 손가락은 다가올 새로운 시대 역시 매일 일하며 살아갈 누군가의 모습에 어떤 영감을 주는가? 고된 노동(labor), 비효율적인 행위(action)와 기다림이 긴 작업(work)인 정원일은 왜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 기쁨은 인간의 조건인 일하는 삶 자체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행복과 겹쳐지는 것인가?


슬로우파마씨, 정원사의 하루, 2019


슬로우파마씨, 정원사의 하루, 2019


흙일, 식물과의 일을 벌이는 정원에서 정원사는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그 움직임에는 언제나 멈춤이 있다. 흙을 일구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그의 손가락은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하염없이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가만히 들여다보고 한가로이 노닌다. 땅의 시간에 맞추어 무언가를 준비하고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주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답을 내어놓거나 보기 좋은 결과를 향해 있기 보다 과정적인 시간이 중심이 되는 정원일은 늘 분주한 것이 옳은, 가속화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역행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는” 한병철의 진단처럼, 그리고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사색적 몰입이 가능한 삶으로 내다보며 그 중심에 기계는 할 줄 모르는 ‘머뭇거리는’ 능력에 주목하는 그의 전망과 같이 정원일의 더딤과 고요함, 한가로움은 앞으로 나아갈 사회가 품을 일의 속성에 가 닿아 있다. 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될 미래사회에서 일은 주어진 큰 틀 안에서 쳇바퀴 돌 듯 속도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영감을 위한 여가와 일의 경계가 사라지고 자신이 조정하는 이완과 머뭇거림의 공간 안에서 놀 듯 일하고 일하듯 노는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머뭇거릴 줄 아는 정원사의 모습은 예술가의 일하는 모습에 그대로 겹쳐진다. 빙하, 유성, 사막과 같은 대자연의 섭리를 이야기해 온 박혜린 작가는 그 거대한 시간의 원리를 멈춤의 경험, 함께 노니는 소요의 경험을 통해 관객들과 함께 느린 풍경으로 만들어간다.


박혜린, 봄여름가을겨울, 2019


모든 것을 정량화, 균일화하는 디지털 사회는 어딜가나 똑같은 삶을 목격하게 한다. 세계는 모니터크기로 줄어들고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만 아무도 서로의 삶에 진정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계는 사라지고 누가 더 오래 살아남는가에 대한 경쟁만 남아있다. 이러한 균질의 시대에 정원사는 늘 변화하는 살아있는 것들을 마주한다. 정원의 생명은 매일이 다르고 정원사는 그 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한다. 정원의 땅은 몸을 가진 각자를 개별화하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던 것들과의 만남을 가능케 한다. “아이들이 제 감각을 믿고 느끼게 하는 것들을 만나게 해주지 않고 온통 생략되고 조작된 것들을 가져와 가르친다”는 놀이운동가 편해문의 말처럼 망막 외에 몸의 감각을 잃어가고 있는 디지털시대에 정원일은 인간이 대지 위에 설 기회를 준다. 그리하여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놀라움을 회복시킨다. 씨앗을 품은 흙의 상태, 천차만별의 개화와 열매맺음, 심지어 변화무쌍한 날씨까지 끊임없이 돌보고 염려해야 하는 정원사의 걱정하는 손은 자아를 저 자신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함께 걷고 있음을 매일 제 몸으로 경험하게 한다. 


베케 더가든, Blooming Meadow, 2019


정량화할 수 없는 온전한 나로 땅의 힘 안에서 일하게 하는 일이자 놀이인 정원일은 ‘00야 같이 놀자’라는 아이들의 외침이 사라지는 시대 직접 몸으로 마주하는 연대의 즐거움 안에서 놀이의 가치를 발견하고 나와 다른 타자를 이해하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통해 세상과 관계맺고자 하는 일 본연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줄 것이다. 자신의 손놀림으로 모내기와 같은 연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아리송의 작품과 끊임없는 몸의 노동으로 치우고 가꾸고 돌보는 정원사의 하루 일을 경험하게 하는 슬로우파마씨의 공간은 정량화할 수 없는 온전한 나 그리고 우리가 되어 일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베케 더가든, Blooming Meadow, 2019


인간 유전자에 새겨진 일하는 삶이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비껴가게 만드는 것은 효율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루를 쪼개어 쓰고 정보공학은 24시간이라는 시간제약을 극복하며 일할 수 있게 돕는다. 현대사회는 현재적 효능성이 큰 하루를 늘이는데 온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정원에서 하루의 가치는 수치화하고 계획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편입된다. “정원사의 손은 아직 거기 없는 것과 접촉한다. 먼 미래를 지켜보는 것이다. 정원사 손의 행복은 거기에 있다”는 철학자 한병철의 정확한 관찰은 그리하여 “정원은 섬광사회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프랑스의 정원사이자 식물학자인 질 클레망의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을 가꾸기에 예측불가능함과 불확실성이 가득한 정원일은 인간의 유한한 시간과 공간을 무한한 자연의 흐름 속으로 끌어오며 자유함을 준다. 하루가 닫히며 기능함을 증명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보이지 않지만 긴 미래를 향해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정원일은 깜박이는 불빛처럼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마는 소모적인 사회가 곧 그 스스로 거대한 생명의 원리에 속함을 알며 보다 길고 멀게 나아갈 줄 아는 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질 미래사회의 일터에 많은 부분을 내다보게 만든다. 파종에서 수확까지 인간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간척지 땅의 흙을 전시장으로 들여오는 김도희 그리고 미술관의 중정에 자연이 그 스스로 만들어가고 가꾸어가는 지속가능한 생태정원을 일구는 제주 베케 더가든의 작품은 예측불가능의 무한한 흐름안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회복하는 인간 본연의 일의 원형을 찾아갈 것이다. 


아리송, Green Wave Green Weave, 2019


일 자체에서 행복감을 찾을 수 있는 좋은 일,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이 자라나는 아이들의 마음에 심겨져 있었으면 한다.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일자리에 대한 관심보다 새로운 관계성에 눈뜨게 해주는 느리지만 풍성하고 무한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일 말이다. 초록엄지는 직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원에서 초록빛으로 물든 엄지는 일 가운데 깊은 심심함에 빠지기도 하고 거대한 흐름 안에서 나를 발견하며 타자에 대한 놀라움을 회복하게 하는 일하는 손가락이다. 미래를 향해있는 그 일하는 손가락을 지금의 정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리송, Green Wave Green Weave, 2019 ⓒsa2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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