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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들이 움직이는 미술관

미술관에 신기한 벽이 있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벽처럼 보이는 이 문은 관람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해리포터에 나오는 9와 3/4 승강장처럼요. 

     

해리포터를 한 번쯤 보았다면 호그와트 행 열차를 어떻게 타는지 알고 있을 거예요. 해리는 마법학교에 가기 위해 9와 3/4 승강장이라고 적혀있는 기차표를 들고 킹스크로스 역을 찾아가지요. 이런 승강장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표기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근처에 다다랐을 때 짐을 실은 카트를 끌고 붉은 벽으로 돌진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벽에 부딪혀 아파하기는커녕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 마른 침을 삼키고 딱딱한 벽을 통과한 해리는 마법학교로 가는 기차를 만나게 되지요.      



우리 미술관에도 신기한 벽이 있어요. 전시 중에는 하얀 벽인 것처럼 시침을 떼다가 전시장에 사람들이 오지 않을 때에만 빼꼼히 열려요. 이 문을 열면 미술관 직원들이 ‘수장고’라고 부르는 비밀의 방이 나와요. 수장고(收藏庫)는 ‘귀중한 것을 고이 간직하는 창고’라는 뜻이에요.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 전시된 작품을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하고요. 블루메미술관 수장고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잘 보관돼 있지요. 그리고 또 하나, 수장고 앞에 딸린 창고에는 미술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재주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답니다.   


   

숨겨진 문이 스르륵 열리면 작품을 설치할 때 꼭 필요한 사다리, 하얀 페인트를 칠하는 롤러, 요란한 드릴과 귀여운 나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요. 작품이 들어오는 날엔 도구들은 하나둘 기지개를 켜며 전시장을 둘러보아요. ‘이번에는 어떤 작품이 들어왔나’, ‘어떻게 전시하면 좋을까’ 하고요. “음, 김진휘 작가가 천정에 판을 달 때는 사다리가 나서고. 안경수 작가의 뿌연 그림과 허산 작가의 <마스크>를 걸 때는 드릴이 필요하겠군. 지난 전시를 안내했던 월텍스트(벽면에 붙은 글자)는 이 분야의 전문가인 칼이 제거하자.”      



미술관 직원들의 손에 들려진 도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요. 전시장에 울려 퍼지는 연장 소리들은 전시를 세우는 마법의 주문 같아요. 특히 드릴은 나사와 손발이 맞을 때면 신이 나서 더욱 시끄러워지지요. 바쁘게 움직이던 도구들이 잠시 숨을 고르면 전시장도 조용해져요. 그 사이 얼룩을 발견한 페인트롤러가 기다렸다는 듯 벽을 타고 춤을 춥니다. 작품들이 자리에 놓이고 나면 도구들은 멀찍이 서서 흡족한 미소를 지어요. 사다리는 프로 중의 프로답게 마지막까지 작품을 설치했어요.      



며칠에 걸쳐 작업을 끝낸 도구들이 흰 벽을 통과하듯 제자리로 돌아가고 창고의 비밀문이 닫히면 드디어 전시가 시작됩니다. 지난 토요일에 첫선을 보인 <검다-이토록 감각적인 블랙>전도 그렇게 일으켜 세워졌어요. 미술관을 다른 장소인 것처럼 바꾸어놓는 여러 도구들은 다음 전시를 준비할 때까지 하얀 벽 뒤에 숨어 저마다 작품 얘기를 늘어놓고 있을 거예요. 장갑과 줄자는 달팽이처럼 몸을 돌돌 말고 벽 너머 들려오는 관람객들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누가 누가 전시를 즐겁게 볼까 기대하면서요.           




* 블루메미술관의 포스트 팬데믹 시리즈 첫 번째 전시 <검다-이토록 감각적인 블랙>은 팬데믹의 블랙 속에서 인간 감각의 변화를 탐색해 보려고 해요. 독립기획자 이상윤과의 협력기획으로, 강은혜, 강현선, 김범중, 김윤하, 김진휘, 안경수, 허산 등 7명의 현대미술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는 4월 18일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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