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동생이 둘 있다. 남동생만 둘이다. 두세 살 터울이다. 우리 식구들은 거의 다 그 정도 나이 차이가 난다. 그 시절엔 피임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이라 자연적으로 그 정도의 터울이 있었던 것 같다. 기억이 정확 친 않지만 세 살까지 엄마 젖을 먹었던 것 같다. 내가 누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생들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며 자랐다. 물론 동생들이 아주 어렸을 적을 빼고 말이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였던 것 같다. 동생들은 나보다 공부를 잘했다. 특히 바로 밑에 남동생은 훨씬 잘했다. 어느 정도로 잘했냐면 시골 동네에 플래카드가 붙을 정도였으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고등학교 땐 성적이 그 학교에서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 정도의 실력이면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촌동네에서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친구들은 많지 않다. 그렇다 보니 동네에서 놀다가 아버지 친구분들을 만나 인사를 건네면 네가 그 공부 잘한다는 그 집 딸이구나, 이런 말들을 심심찮게 하셨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 내 동생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정말 개천에서도 용은 하늘로 치솟는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개천에서 용 나는 그런 시대는 절대 아니다. 그나마 그땐 그게 가능했다. 꼬질꼬질 손때가 묻은 옷을 입고 사는 시골 동네에서도 말이다. 동생은 서울에서 제일 좋다는 s대학에 철썩 붙었다. 문과였다. 지금이야 이과가 대세지만 그때만 해도 문과가 대세였다. 그때 예비고사 성적이 어마어마했었던 걸 나도 기억한다. 나로선 꿈도 꾸지 못하는 점수였다. 정말 좋은 성적으로 그 대학에 붙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자랑하러 동네방네를 돌아다니셨다. 집에 가만히 붙어 있질 않으셨다. 핑계가 있긴 했다. 아버지는 동네 이장을 하시던 시절이라 더더욱 자랑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면단위 동네라 동생이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그 소문은 동네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동생이 공부를 그렇게 잘하기 바로 그 전 까지는 집에 돈이 없었다. 그래서 오빠, 언니, 나까지 모두 대학은 꿈도 못 꿨다. 나중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오빠도 그랬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허리를 펼 수 없던 가난이 조금씩 허리를 펴기 시작한 시점도 그때 즈음이었다. 나랑 오빠, 언니는 마을에 플래카드가 붙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하진 못했다. 그렇게 따지고 본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마을에 플래카드가 붙을 정도의 실력과 돈은 어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나붙은 플래카드는 오랫동안 골목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펄럭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부천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동생이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엔 나랑 같이 지내다가 기숙사가 되면서 동생은 기숙사 생활을 했다. 덕분에 그 학교 대문을 넘어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신림동 쪽으론 갈 일이 거의 없던 터라 처음 가보는 가슴 떨리는 장소였다. 마음속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유명한 곳을 내가 직접 밟아보다니 영광스럽기까지 했다.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살면서 여길 와보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물론 서울에 살았다면 버스만 타면 오는 학교였으나 섣불리 발을 들여놓진 못했던 학교였다. 그야말로 먼발치에서만 보던 그런 학교였으니 그럴 법도 하다. 누구나 선망하는 대학교, 쉽사리 문턱을 넘어서기 어려운 학교였다. 관악산을 가본 기억은 있으나 학교를 들어간 본 적은 없던 터였다. 그렇게 동생의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 트렌드 마크인 그 학교 입구는 지금도 여전히 바뀌지 않은 채 그때 그 모습으로 서 있다.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사이에 기숙사도 졸업했고 나랑 같이 또 한참을 지내다가 신림동 근처에 조그만 전세방을 하나 얻었다. 동생도 자취를 시작했다. 학교 근처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동생의 의견에 가족들이 모두 합의했다.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러는 사이에 막내도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에 있는 s대에 붙었고 막내는 나랑 같이 부천에서 지냈다. 가끔 신림동에 반찬을 해다 주곤 했다. 난 음식 솜씨가 없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잘 못한다. 그래도 가끔 밑반찬을 해다 주곤 했다. 맛이 있든 없든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가끔씩 손에 용돈도 쥐어 줬다.
동생은 대학원까지 졸업했으나 취직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공부는 쉬웠지만 취직은 생각대로 잘 되지 않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태까지는 모든 것들이 동생 생각대로 되고 있었다. 그랬는데 이젠 안 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 보니 동생 실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실패를 모르던 동생이 실패가 반복되자 그런 자신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거기다가 연애도 제대로 된 것 같진 않다. 동생은 말 그대로 샌님이었다. 공부만 줄곧 파고들었다, 남들이 동생을 보면 다들 그렇게 말한다. 실은 내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 책이나 공부에 관한 것이라면 할 말이 정말 많은 동생이었지만 사회생활에 관한 것들에 대해선 그렇지 않은 학생이었다. 어쩌면 그 당시 동생은 모든 것들을 책 속에서만 배웠을는지 모른다. 책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책으로 배운 연예가 취직이 현실에선 잘 먹히지 않을 때가 많다. 그리고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동생 키는 그리 크지 않다. 그때만 해도 키 큰 남자들이 별로 없긴 했지만 작은 키에 속했던 동생으로선 우선 그 점에서부터 한 끝 접고 들어갔던 모양새다. 아주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여학생들이 선호할 만한 키는 아니었다. 그래서 였을까,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학생은 아니었나 보다. 연애에 관해서 난 정확하게 모른다. 가끔씩 누군가를 사귄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나에게 소개해 준 적은 없었다. 그 시절의 연애란 약간은 비밀스러운 그런 연애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동생의 청춘은 지나가고 있었다.
취직을 위해 여러 군데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좋은 대학을 나왔으니 원서를 넣을 곳은 많았다. 그러나 동생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방송국이나 신문사 쪽으로 가고 싶어 했다. 어느 곳이든 필기는 합격했다. 그런데 그다음이 항상 문제가 되곤 했다. 처음에 몇 군데 냈던 회사에서 일차에는 되고 그다음 면접에선 떨어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어떤 일에서건 자기가 떨어질 수 있다는 일은 경험하지 못한 동생으로선 떨어졌다는 것에 대해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랬던 동생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랬으니 그것을 인정하기란 정말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나처럼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취직에 실패도 해보고 쌀이 없어서 라면으로 끼니도 때워보고 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이 없다가 취직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 나는 믿지만 동생은 믿지 못한 말이었다.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방송국 시험에서도 필기시험엔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떨어졌다. 시험에 응시하면 연락은 온다. 필기시험은 잘 본다. 그런데 꼭 마지막 단계인 면접에 가면 이상하게 자꾸 떨어진다. 그때만 해도 나는 부천에서 직장 다니랴 야간대학 다니랴 아이들 케어하랴 정말 정신없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동생이 힘들 때 내가 옆에서 조금만 케어를 해주고 말동무라도 해줬으면 동생이 힘을 얻었을 텐데 나도 먹고 사느라 바쁜 날들의 연속이었기에 동생을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이런 변명밖에 할 말이 없다. 동생이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 정말 몰랐다. 그 정도까지 일 꺼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난 누나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지나고 나니 그때 내가 동생을 잘 이해하고 다독여 줬으면 동생에게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든다. 그때 동생을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 상태의 동생을 방치한 것에 대해 난 할 말이 없다. 한편으론 내 잘못도 크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동생도 이만저만 맘고생이 아니었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도 한 가닥 한가닥씩 빠졌다. 처음엔 그러다 말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나도 했고 동생도 했다. 그렇게 심각하게 머리가 빠지게 될 줄은 몰랐고 가족들도 전혀 몰랐다. 신림동 자취방에서 그런 세월을 동생은 혼자 보내고 있었다. 혼자 겪고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그저 먼발치에서 혼자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으려니 안일하게 생각했다. 왜냐면 똑똑한 동생이었으니까 뭐든지 혼자서 잘 해낼 거라는 생각으로 방치했던 것이다. 그동안 동생은 우리 가족에게 그런 애였으니까 다들 믿었던 것이다.
너무나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은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이다. 취직은 안되고 젊은 나이인데 머리가 자꾸 빠지니까 결국은 모자를 쓰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엔 모자가 유행할 시기가 아니었다. 모자를 쓰고 다니는 동생은 유달리 사람들 눈에 더 잘 띄었다. 유럽에 가면 대머리 천진데 한국엔 별로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 이십 대에 모자를 쓰고 다니려니 본인에겐 얼마나 스트레스였을까, 버스를 타면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한눈에 받았고 그 따가운 눈총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존심이 센 아이였으니 본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잘 풀려가지 않는 것에 대해, 자꾸만 없어지는 머리카락에 대해, 여러 가지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겼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대로 잘 견뎌오던 동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고 오빠 한데도 연락이 왔다. 동생이 죽었다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살이라니, 처음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외계어인가? 가족들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말이었다. 무슨 이런 연락이 우리 한테 오나 싶었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칼퇴를 하고 서울에 있는 모 의원으로 갔다. 조그만 개인병원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시골에 있어서 내가 가장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 동생을 확인하고 물건을 확인하고 사체 검안서를 떼어야 한다기에 그것도 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용산 경찰서로 병원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일들이 생겼고 가족들은 다 넋이 나가 있었다. 특히 엄마랑 아버지는 실신할 정도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동생을 보냈다. 그 이후에 우리 가족들은 동생 이야길 하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시골에 갈 때마다 엄마는 동생 방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처음엔 책들을 치우고 그다음엔 가방을 치우고 그다음에 가보면 또 한 가지 물건이 없어지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자 방에서 동생 물건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물건을 치우기 전에 엄마는 그 방에만 들어가면 통곡을 하곤 했다. 동생 손 때가 묻은 물건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나서 미치겠다고, 물건들을 볼 때마다 맨날 우는 엄마를 보는 자식들도 덩달아 속상했다. 부모님은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자기들 탓이라며 머리를 쥐어뜯곤 하셨다. 그렇게 우는 부모를 보고 다른 식구들도 같이 엉엉 울곤 했다. 그렇게 동생은 우리 가족에게서 멀어져 갔다. 지금도 동생만 생각하면 눈물이 맺힌다.
요즘도 20-30대의 자살이 많다고 한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동생이 생각난다. 어쩔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 한편, 왜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들지 않게끔 해주지 못했을까 라는 반성이 된다. 주변에서 덜 외롭게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정작 본인은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싶다. 본래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하지만 주변에 터 놓고 이야기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라는 자괴감이 든다. 옆에서 보살펴줘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해주지 못해서 동생이 그렇게 된 건 아닐까.
해마다 봄은 온다. 동생이 하늘로 떠난 계절은 모든 것이 움트는 봄이다. 모든 것이 되살아나는 계절에 동생은 갔다. 한번 가면 오지 못할 그곳으로의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이란 돌아오는 것이라는데 동생은 한번 떠난 여행에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도 이곳보다는 그곳이 동생에겐 편한 모양이다. 그곳에선 네가 원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겠지 라며 나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계절은 변함없이 돌아오는데 동생을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동생이 간 계절은 그야말로 꽃 피고 새우는 계절 봄이었다. 좋은 계절에 하늘로 돌아갔으니 거기에선 못다 핀 꽃을 다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 젊은 날, 젊은 피로 짧게 살다 간 동생, 지금도 내 책꽂이에는 동생이 써 놓은 대학원 논문이 꽂혀 있다. 나 여기 있어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