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땐 우린 남녀 공학이었다. 시골이라서 몇 반 되지 않았다. 남학생 반은 다섯 반, 여학생반은 3반이었다.
아주 깡촌에 사는 친구들도 많았다. 게네들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난 학교에서 십분 거리에 살았다. 깡촌에 사는 친구들에 비하면
난 도시에 살고 있는 거였다.
도시도 도시 나름이겠지만 그 친구들에 비하면
도시였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도시란 면단위 동네다.
우열반이 있었다. 남학생 한 반, 여학생 한 반. 이렇게 두 반이 있었다.
공부를 썩 잘하진 못했지만 우열반에 들었다.
선생님들은 꼭 인문고를 가야 한다고
수업시간마다 우리를 세뇌시켰다.
집에선 엄마가
학교에선 선생님이
각자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난 이 말을 들으면 이게 옳은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게 옳은 것 같고
들을 때마다 헷갈렸다.
어느 날은 담임 선생님이 고등학교 교정을 미리 데리고 가서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그 교정엔 연못도 있었다. 경치가 너무 멋졌다.
그 연못 앞에서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선생님은 나에게 말했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공부하고 싶지 않니?
그러고 싶었다. 연못도 예쁘고 교복도 예뻤다.
가고 싶었다. 그러나 집에선 엄마랑 아버지가
딱 버티고 서 계셨다.
쉽지 않았다. 엄마 아버지를 설득할만한 힘이
내겐 없었다. 자신도 없었다.
여태까지 부모가 바라는 대로 살았다.
거부라는 걸 몰랐다. 반대를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똑똑하지 못했다.
대학 보낼 돈이 없단다. 별도리가 없었다.
오빠나 언니도 대학을 못 갔다. 공부를 잘했던 오빠도 대학을 못 보낼 정도로 우리 집은 가난했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을 다녔다. 부천에서 대부분의 직장생활을 했다. 직장을 잡고 나서 얼마 후에 난 방송통신대학 경영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합격 통지를 받고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만뒀다. 그때만 해도 남들처럼 멋진 대학생활을 꿈꾸는 이십 대였다.
그런 낭만적인 대학생을 꿈꿔 온 나에게 방통은 전혀 재미있지도 신비롭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공부에 흥미가 떨어졌다. 더군다나 방송으로만 들어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간에 대한 제약은 없었으나 문제라면 그것이 문제였다. 아무 때나 하면 되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공부를 했다. 그러다 보니 내일 하지 뭐, 모래 하지 뭐, 이렇게 세월만 보내게 되었다.
핑계를 하나 더 보태자면 그때만 해도 먹고살기 힘들 때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주어지는 월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처음 내 손에 쥐어진 월급은 이십만 원도 안되던 작은 돈이었다. 물론 그 당시엔 월급들이 다들 작던 시절이긴 했지만 남들보다 더 작은 월급이었다. 그 돈으로 생활비 쓰고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던 시절이었다. 공부하는데 돈이 많이 드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 당시엔 그것마저도 사치로 여겨졌다. 입학은 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끈기가 부족했고 여러 가지 핑계를 찾으며 결국은 그만뒀다.
그렇게 쉽게 대학을 포기했다. 그러는 사이에 남동생 두 명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그 핑계로 먹고사는 일이 더 힘들어졌다. 물론 엄청나게 큰돈이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들어갔다. 중간에 한두 번 정도 학비를 보탠 것이 전부다. 내놓고 큰소리칠만한 케이스는 아니다. 겨우 누나 노릇 한 것일 뿐,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찾던 나에겐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핑계, 결국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자연스레 공부와 멀어지고 그렇게 현실에 안주해 살았다.
서른 살 즈음에 대학 가려고 학원을 다닌 적 있다. 부천 직장에서 퇴근 후 서울로 야간 학원을 다녔다. 졸업한 지 10여 년이 넘은 후라 공부와 담쌓은 지 정말 오래된 상태였다. 그런 두뇌였지만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했다. 막상 시험을 봤는데 점수는 절반 정도나 될까 말까 한 점수가 나왔다. 그 점수로는 지방대학도 겨우 될까 말까 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고향에 있는 대학에 넣었다가 떨어졌다. 동생들은 서울에 있는 전문대학이라도 가지 그러냐고 했지만 그 당시 내 자존심으론 전문대학 가기는 정말 싫었다.
대학을 가야지 하는 이런 생각들은 나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그 주기가 내 기준으로 보면 10년에 한 번씩은 찾아오는 것 같다. 처음엔 그런 줄 몰랐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정도 기간이 되면 무슨 고질병처럼 대학 가고 싶다는 병이 생기곤 한다. 그렇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공부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대학에 대한 갈증 같은 것이 나도 모르게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매 순간 내 눈치를 보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고개를 삐죽 내밀곤 한다.
직장 생활은 무난했다. 동생들도 다 대학을 졸업했다. 나도 결혼을 했고 동생도 결혼을 했다. 이젠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 낳아 키우느라 바쁘게 살고 있다. 난 딸과 아들을 낳았고 둘은 한 살 터울이다. 결혼하자마자 생기는대로 둘은 낳아야지, 생각했는데 생각대로 둘을 낳았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퇴근해서 집에 가면 아이들 숙제를 봐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에 대한 갈증이 다시 또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참에 나도 다시 공부를 시작해볼까? 엄마는 공부 안 하면서 자식들에게 공부하라고 아무리 큰소리를 쳐봐야 소용없다. 부모가 먼저 책을 들어야 자연스레 아이들도 책을 본다는 말에 동감을 하던 나였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더욱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기회다 싶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다.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빨리 결정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마흔 살에 드디어 대학을 갔다. 불혹의 나이였다. 무엇을 당해도 망설이지 않을 나이다. 그래서 그 나이에 시작을 했을까? 살짝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나이에 남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고위직 간부가 되어 있을 나이다. 부모님이 보내주지 않았으니 내가 돈 벌면 대학을 꼭 가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실천된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지켜낸 약속이었다.
대학에 원서를 넣고 실기 시험을 쳤다. 물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솔직히 붙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대학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대학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솔직히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 합격했다는 통지가 온 것이다. 정말 몇십 년 만에 느껴보는 감격스러운 장면인지 모른다.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었다. 이렇게 행복한 적이 있었나 돌이켜 보았으나 단연코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사이 동생들이 좋다는 대학에 합격했으나 그것은 동생들의 몫이지 내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합격했다. 동생들이 합격했을 때보다 기분이 더 좋았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공부를 한다고 직장을 그만둘 순 없었다. 학비도 내야 하고 아이들 학원비도 벌어야 했다. 그렇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엔 없었다. 야간대학을 가는 일이었다. 난 이런저런 잡글을 끄적이는 걸 좋아한다. 갈래 머리 시절부터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베끼거나 외우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국어 선생님이 칠판에 시를 적어놓고 창문을 바라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시를 읊어 내려가는 모습에 반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문창과 쪽으로 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문창과, 그 당시에는 서울예전이 제일 잘 나가고 유명했는데 거긴 야간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전문대학에 눈길도 안 줬겠지만 지금은 내 상황이 달라졌다. 야간에 다닐 수 있는 문창과는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내 실력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젠 머리 회전력도 떨어져 다시 시험을 칠 수도 없는 실력이었다. 고등학교 내신과 실기로 결국 전문대 야간 문창과를 갔다.
그때 아이들은 초등학생이었다. 한참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학교에 원서를 넣었고 입학을 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 신랑한테 말했다. 대학을 가겠노라고. 그전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합격통지서를 받고 나서야 겨우 말을 꺼냈던 것이다. 신랑은 가지 않길 바랬다. 남들은 돈 버느라 눈이 빨간데 돈을 쓰러 다닐 거냐며 엄청나게 반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고집대로 학교를 다녔다.
그때부터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수업시간은 6시부터 시작이었다. 그런데 나의 퇴근시간은 5시 30, 아무리 칼퇴를 한다고 해도 서울에 있는 학교까지 가는데 1시간은 걸리고 30분은 항상 지각이었다. 직장 때문이라 교수님들도 사정을 봐줬다. 그렇게라도 다닐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힘들고 지친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정말 행복했다. 그것보다 더 큰 일들은 집에서 일어났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10시, 집에 오면 11시가 훌쩍 넘는 시간이었다. 신랑이 지방에 출장 갔을 때 일은 꼭 터진다. 아이들만 집에 있을 땐 문 꼭 잘 잠그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아파트 걸쇠마저 걸어 잠그고 잔 것이다. 그럴 땐 아무리 크게 탕탕 문을 두드려도, 전화를 해도, 아이들은 깨지 않는다. 늦은 시간이고 옆집에 민폐다 싶어 두드리는 걸 여러 번 포기해야 했다. 그럴 땐 할 수없이 열쇠업자를 불렀다. 그 시절엔 번호키가 아니었다. 그렇게 아파트 열쇠를 몇 번 갈아 끼웠다. 그땐 왜 번호키로 바꿀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했다. 전문대학이라 2년은 금방 갔다. 졸업식 하는 날, 엄마를 비롯해 아버지, 오빠 언니 동생, 우리 가족 모두가 출동했다. 힘들게 시작한 공부였으니 졸업식은 꼭 참석한다고 식구들이 모두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왔던 것이다. 그때 엄마가 한 말을 지금도 난 잊지 못한다. 그렇게 대학 대학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은 졸업하네, 툭 한마디 건넸다. 유행가 가사처럼 때만 되면 노래를 불렀던 그렇게 고대하던 대학을 이 늦은 나이에 엄마가 되어서야 졸업을 한 것이다. 남들 눈에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전문대학일지언정 나에겐 정말 눈물겹도록 벅찬 감정을 안겨준 대학이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갈증은 심해졌다. 2년 가지곤 택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끄적이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문창과 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글을 쓰기엔 많이 부족했다. 공부를 했다고 해서 다들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창작의 경우엔 더욱더 그러하다. 지금도 부족하다는 생각엔 변함없다. 그래서 모대학원에 있는 특수대학원 특별 과정에 입학을 했다. 그것도 야간이었다. 일 년 과정을 마치고 그다음부터는 개인적으로 선생님들한테 시를 공부하러 다녔다. 그렇게 시를 배우면서 신춘문예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 신춘에 당선됐다. 책도 한 권 출간했다. 남들보다 늦게 공부했고 남들보다 늦게 신춘에 당선되다 보니 유명하진 않다. 아마 젊은 나이에 신춘에 됐다면 유명해졌을 테지만 나처럼 이미 나이가 먹은 사람은 별로 알아주지 않는다.
50이 넘어 또다시 가슴이 들끓기 시작했다. 또 그 주기가 된 것이다. 이젠 아이들도 다 컸고 조그마한 내 집도 있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늘 가슴 한편은 허전함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또 무언가 사고를 쳐야만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나는 사고라는 말로 대신한다. 내가 아이들 초등학생 때 힘들게 대학을 다닐 때도 신랑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문창과가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돈 써가며 힘들게 그렇게 공부를 해야만 했냐고 말한다. 아이들이나 잘 키우지 늙어서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늘 투덜댔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번엔 예전에 포기했던 방통 국문학과에 편입했다. 이번엔 저번처럼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 나이엔 못할 것이 없다. 여전히 직장을 다니면서 시험 때는 휴가를 내면서 공부했다. 이젠 그곳도 졸업했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대학, 나에겐 파란만장한 곳이다. 동생들이 한 방에 간 대학을 나는 이렇게 힘들게 들어갔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돈 벌어서 내가 간 대학이었다. 포기도 여러 번 했지만 결국 난 해냈다. 비록 늦은 나이에 들어가긴 했지만 후회는 없다. 그래도 열심히 살았으니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