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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Jan 17. 2023

아직도 눈물

개안타 개안타는 진리였다



나는 울었다. 

내 운명이 억울했다. 참고 참은 울음을 엄마를 향해 뱉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된 아들이 팔을 부둥켜안고 돌아왔다. 조그마한 아들 눈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엄마에게 혼날 두려움 하나와 이미 겪어 본 고통을 예감하는 두려움이다. 그네를 타다가 떨어졌단다. 친구가 뒤에서 밀었다고 한다. 팔을 펴지 못하고 통증을 호소했다. 잠바를 벗기고 소매를 걷어 올리자 이미 팔이 퉁퉁 부어 옷이 올라가질 않는다. 골절이다. 몇 년 전 다리 골절을 경험한 녀석이다. 그때와 다르지 않다. 왜 또,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까?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린다. 마침  같이 있던 언니가 자기네 단골병원이라는 정형외과에 데려다줬다. 대학병원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개원한 선생님이라고 했다. 사진을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이 제일 초조한 시간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의 시간이다. 하지 않아도 될 온갖 상상이 머릿속에 맴돈다. 곧 돌아올 딸아이, 입원과 수술, 텅 빈 잔고, 실업자가 된 남편.

"아, 이거 곤란하게 됐네. 하필 성장판 주변이라..... 소견서 써 줄 테니까 지금 바로 대학병원으로 가세요."

대학병원 과장쯤 했으면 성장판이든 인대든 그곳이 어디든 다 고쳐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우리를 이렇게 내팽개치려 하지? 내 불안을 선생님께 의지하고 싶은데 그마저 여의찮다고 하신다.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더 고통을 얹어주신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요모조모 설명하신다. 성장판 주위라 혹시나 수술이 잘못될 경우 맞게 될 최악의 상황을 일러주며 우리 모자를 버리려 한다. 집 근처를 떠나 멀리 있는 병원으로, 낯선 곳으로, 못 고칠 병들의 집합소 같은 대학병원으로 가라니, 아픈 아이는 더 아프고 놀란 나는 이미 핼쑥해졌다.

어느덧 퇴근 시간을 향해간다. 소견서가 마치 동아줄인 양 움켜쥐고 택시를 타고 달려갔다. 종이 쪼가리 한 장의 힘은 제법 컸다. 목에 걸고 온 팔걸이에 쓰인 '000 정형외과'만 보고도 대학병원 의사들은 전 과장님을 모시듯, 아들을 알아서 모셨다. 떠난 권력의 힘이 아직 건재함을 느꼈다. 이러저러한 절차가 끝나자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일반 수속을 했으면 가당치 않았을 진행이었다. 

나는 울었다. 

울음이 멈춰지질 않았다.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남편이 집으로 돌아가고 수술실 밖엔 나 홀로 남았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남편과 홀로 컴컴한 수술실 밖을 지키는 내 모습이,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과 운명이 아프고 외로웠다.  

남편의 실직이 길어졌다. 젊어서, 실력 있어서 금방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의 재취업은 쉽지 않았고 웬일인지 취업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공백이 길어지자 무기력마저 찾아왔다. 집을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자라고 통장 잔고도 이미 바닥이 드러났다. 부부관계도 돈으로 이어진 관계인지도 모른다. 고락을 같이해야 할 부부가, 돈 앞에 으스러졌다. 드러내기 어렵지만 미움과 원망이 슬그머니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지자 남편은 친구가 일하는 자갈치 시장, 생선 저장 창고에 나가게 됐다. 생선가게에서 주문한 명세서를 보고 냉동창고에서 물건을 꺼내 각 가게로 실어다 주는 일이었다. 꽁꽁 언 무거운 생선 상자를 하루 몇백 개씩 지고 나르는 일을 했다. 새벽 4시에 출근해 이른 오후에 퇴근했다. 비릿한 생선 냄새와 초라한 몰골로 돌아오는 일은 실직 상태일 때보다 더 적응되지 않았다. 씻어도 남아있는 듯한 생선 냄새를 늘 점검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 다시 뒤집어쓰고 마는 냄새였다. 컴퓨터 앞에서 머리만 쓰던 사람이 처음으로 막노동을 하게 되었다. 캄캄한 현실에 궁여지책이라 가혹한 시간마저 감당해야 했다. 안 해본 일이 잘 맞는 옷처럼 쉬울 리 없다. 처음 며칠보다 오히려 긴장이 풀어질 즈음에 몸살이 찾아왔다. 열에 들뜬 몸을 이끌고 출근하고 있었다. 그때, 아들마저 일을 당한 것이다. 아픈 아들과 아픈 남편을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아들은 수실실로 남편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생계는 남편이 책임지고 있는데 마치 내가 이 식구들을 책임지고 있는 듯 암담했다. 오늘의 캄캄함이 미래가 될까 봐 두려웠다.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 더 두려웠다. 연이은 악재들이 숨통을 죄어왔다. 내가 두려웠다.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늦은 밤 수술실 앞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어서 울고 싶었다. 아무도 없어서 울 수 있었다. 엄마 목소리를 듣는 순간 터져버렸다. 응급상황처럼 전화를 걸었지만, 눈물이 말을 막았다. 다 큰 엄마가 오래된 엄마를 붙들고 어린 짓을 했다.

"개안타, 개안타. 울지 마라 개안타. 다 지나간다. 젊어서 그런 건 개안타이"

엄마는 사정도 모르면서 나를 달랜다. 비상구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들켜버린 울음을 애써 달래지 않았다. 엄마 목소리에 응원을 받아 울음은 더 활기차졌다. 처음으로 엄마에게 고통을 보여주었다. 당황스러울 엄마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개안타 개안타이. 아픈 거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울지 말고 마음 단단히 무라이"

그동안 씩씩한 딸이어서 위로에 익숙지 못한 엄마였다. 어떤 말이 위로인지조차 모르는 엄마처럼 개안타만 반복했다. 목이 잠긴 채로.

한꺼번에 닥친 우울한 일들을 아내란 이름으로 엄마란 이름으로 참고 견뎌왔으나 그날 밤 여름 장마에 무너져버린 둑처럼 속절없이 터져버렸다.

비가 온다. 

개안타는 엄마 말은 늘 그렇듯 진리였다. 뼈는 금세 붙어버렸고 우리도 금방 개안아졌다. 그러나 개안치 않았던 그날은 여전히, 아직도 눈물로 남아있다. 

비가 온다. 비가 와서 다행이다.

덧) <매일매일 글쓰기>벗들과

'나는 울었다.'로 시작하는 글쓰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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