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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Jan 03. 2023

역사

청춘이 깃든 집이여 안녕~


 - 그래, 집은 한 칸 있더나?


마지노선이었다. 더 이상 반대할 수 없다고 여겼을 때 최후의 보루로 던진 엄마의 질문이었다. 그마저 통과하지 못했더라면 우리 결혼은 성사될 수 없었을 테다. 외동아들인 것도, 이제 갓 대학 졸업하고 직장이 시원찮은 것도, 시누이가 넷이나 된다는 것도, 무엇보다 절대로 허용할 수 없었던 '김'씨라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엄마 마음에 드는 조건이 없었지만, 딸은 반드시 이 남자여야만 한다는 듯 매달렸다. 어린 딸을 달래도 보고 혼내기도 하고, 악담을 퍼붓기도 해 봤지만 둘 사이를 떼 놓을 수 없었다. 감정에도 농도가 있다면 엄마의 불안은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는, 짙음 중의 짙음이었을 테다. 당신의 예감이 옳아야 한다는 듯 일방적이었고 앞뒤 분간 못하는 딸의 미래가 뻔하다는 듯 예단하셨다.

"그래, 집은 한 칸 있더나?"

스스로 당신의 고집을 꺾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엄마가 던진 첫 질문이었다. 여태껏 볼 수 없었던 다소곳함이었다. 그것은 당신의 고집을 꺾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행여나 그 조건마저 통과하지 못할 것에 대한 의심이었다. 그것이 마지노선이라는 듯, 끝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애를 쓰셨다.


시어머님은 여전사였다. 일찍이 남편을 믿고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치마만 두른 대장부가 되었다. 어쩌다 매입한 조그마한 땅을 몇 달 만에 세 배의 웃돈을 받고 팔게 되었다. 그때 어머님의 생계에 작은 등불이 켜졌다. 딸 넷에 아들 하나, 가장 노릇에서 점점 멀어지는 남편, 조롱조롱 딸린 친정 식구, 대놓고 숨통을 죄어오는 시동생들. 그것은 어쩌면 살아갈 수도 있겠단 희망의 등불이자, 또 다른 고달픔의 시작이었다.

집을 지어서 팔면 돈이 되겠다 생각했다. 어머님은 이미 여자이길 포기했고 살림만 하는 여자로 살기엔 세상에 돈 될 것들이 넘쳐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진 돈으로 조그마한 슬라브에 방 세 칸을 넣어 집을 지었다. 매주 꼬박꼬박 들어오는 3만 원에 어머님은 감격했다. 일정하게 들어오는 돈의 힘을 알았다. 큰돈은 아니지만, 아이들 준비물 살 돈이 되었고 고픈 배를 채워줄 양식이 돼 주었다. 그 집을 팔아 땅을 사고 또 집을 지었다. 빚을 갚고도 돈이 남았다. 또 땅을 사서 집을 지어 되팔았다. 자신감이 붙자 이번엔 이층 집을 지었다. 그것도 금방 팔려 돈이 되었다. 빚을 갚고 아이들 대학 등록금이 되었다. 또 빚을 내 3층 집을 지었다. 그동안의 노하우가 집결되어 거친 인부들을 관리하는 것도, 그들만큼 일을 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집은 더 단단해졌고 자신감도 그만큼 단단해졌다. 아내가 커지면 커질수록 남편은 집보다 밖을 돌았고 당신 설 자리를 스스로 야금야금 깎아먹고 있었다. 어머님은 이 집이 팔리면 기필코 이혼하겠다고 결심했다. 아버님의 복이었을까? 덩치 큰 집은 빚을 안은 채 절대로 팔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어머님이 그 집에 들어와 살아야 했고, 그 세월이 30년이나 흘렀다.


"응, 3층 집이던데?"

아들 넷을 장가보낸 엄마다. 도시에서 집 한 칸 마련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세상 물정 모르는 엄마도 다 안다. 당신 아들들도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해 동동거리는 걸 뻔히 알고 있다. 엄마에게 집은, 노동의 이유이자 모든 것이었다.

3층 집이란 말에도 엄마의 얼굴색은 변함없다. 좋은 것에 좋은 것을 더한 게 아니라 최악에서 하나를 건져 올린 안도감이라, 다행이지만 내색하기엔 당신의 분별심이 부끄럽다. 그러나 그 이후로 엄마의 반대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모든 실랑이의 종결점이 돼 주었다. 불안과 안도 사이에서 오래도록 갈팡질팡했을 엄마의 해진 가슴을 이제야 들여다본다.


딸과 함께 쇼핑하러 가다가 그 집 앞을 지나게 됐다. 아니다. 일부러 찾아가 봤다. 이 집에서 우리가 살았던가 싶을 정도로 헐벗고 있다. '공가'라는 붉은 글씨가 벽마다 쓰여있고 '철거 계획'이란 플렛 카드가 1층에 떡하니 걸려 있다. 창이란 창은 다 사라지고 문이란 문이 다 사라진 집, 간판 걸린 자리엔 페인트칠하지 못해 원래의 벽돌색이 드러난다. 집이랑 여자는 꾸며야 제값 받는다는 말을 처참해진 흉가 앞에서 느낀다. 30년을 이 동네 유지(有志)로 지켜오던 집이 '공가'가 되는 건 순간이다.

이 집만 팔리면 한몫 쥐어 남편과 이혼하리라던 어머님의 꿈이 실현되기도 전에 우리의 신혼살림이 보태졌다. 어머님에겐 이혼도 물 건너가고 혹 하나가 더 붙은 격이 되었다.

아들딸이 태어나 3층 집에 꽃이 피었다. 오래도록 차가웠던 벽돌집에 온 선물이었다. 아이들이 올망졸망 자라 유치원에 갈 무렵 분가했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홀로 되신 어머님은 이혼 결심이 무색하게 남편의 빈자리에 힘들어하셨고 결국 우리를 다시 불러들이고, 당신은 2층으로 분가하셨다.

근 10년 동안 장사를 하던 1층 호프집에 불이 났고 한동안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남편이 '불나서 대박 날 집'이란 플렛 카드를 걸었고 낚싯바늘에 걸리듯 카페가 들어섰다. 그러나 카페도 계약만료로 나가고 공백기가 있었다. 난데없이 어머님은 돼지국밥집을 하시겠다고 의논도 없이 일을 저질러 나를 황당하게 했다. 1층과 3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손님과 나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하던 중 출장 간 남편이 사고가 나 돌아왔다. 수술과 병간호를 위해 병원에 들어갔고 돼지국밥집은 다른 임차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그 집에서 태어난 아들이 어느새 커서 군대에 갔고, 집도 리모델링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흉가가 된 집을 바라보니,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생각난다.

벽돌 한 장 한 장에 든 어머님의 억척스러운 청춘과 멋모르고 시집와 내 청춘을 보낸 집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결혼을 허락한 내 엄마의 희망도 살짝 깃든 집이다. 어머님의 손에 의해 지어졌지만, 나와 우리 가정이, 그 외 많은 세입자의 인생이 여기에 머물다 떠났다. 어머님의 고단함으로 탄생되어 이제는 흉가가 된 집에 사소하지 않은 우리의 사소한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부처님이 나 먹고살라고 그렇게 안 팔리게 한 모양이다."

이 집만 팔리면 이혼하리라던 어머님의 결심은 무산되었다. 부처님은 이혼 대신 일찍 아버님을 모시고 가는 걸로 어머님의 불공에 화답했고 이 집은 어머님의 든든한 노후대책이 되어 주었다. 어떤 자식도 해 주지 못하는 수입을 다달이 안겨주는 효자 노릇을 해 왔다.

긴 세월을 어머님은 휴지기로 보내셨다. 지인에게 점찍어 주는 물건들이 모두 귀신같이 대박을 쳤지만, 당신 손에 쥔 돈이 없어 그림의 떡으로만 봐야 했다. 꼬박 30년을 채우고서야 재개발로 다시 어머님께 희망이 주어졌다. 마지막 불꽃처럼, 단 한 번 주어지는 기회처럼 어머님은 심사숙고하셨고 우리의 이주는 시작되었다.


빈 집 앞에 서서 흘러간 내 삶을 훑어보았다. 어머님의 30년과 내 20여 년이 아직도 빈 집에 남아 바람처럼 떠도는 듯하다. 우리의 청춘이 묻은 이 집이 철거로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고단했던 청춘이었지만, 지금 여기 서서 느지막이 바라볼 여유를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며 새로운 역사 속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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