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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Dec 27. 2022

누더기 목련

늙음은 잔인하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암 환자처럼.' - 김훈 <자전거 여행>


해마다 봄이면 저절로 손이 가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다. p22, 하도 많이 봐서 페이지까지 외운다.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는 나에게 신기루 같은 책이었다. 정신없던 육아를 끝내고 책이 눈에 들어왔을 즈음 마을 도서관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작은 도서관'이었지만 가득 차 있는 서가에서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막막했다. 쉬워 보이는 책부터 골라서 봤다. 어디선가 '추천 도서'라는 글을 보면 눈여겨보았다가 도전해 봤지만 추천하는 사람의 수준이 내 수준에 맞지 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즈음에 한참 관심 있던 '마음'에 관련된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보이지 않는 마음이 무엇이길래 육체를 좌지우지하는지 마음의 속성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렇게 어설프게 독서가 시작되었다. 마흔 즈음에.


카톡 사진에 《책은 도끼다》를 올려 둔 지인의 프로필을 보았다. 끌림이었다. 작가와 책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끌렸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어려웠다. 그래도 읽었다. 읽어 내고 싶었다. 책 속에 소개하는 책은 한 권도 읽은 게 없다. 당연하다. 소개하는 책을 다 읽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좀체 일지 않는 욕망이었다.

그 속에서 김훈을 만났고 죽어가는 목련을 만났다. 목련에 대해 한 페이지를 쓸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오래도록 바라보는 작가의 정성이 작가의 의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자연에서 피는 꽃 중에 제일 좋아하는 꽃이 목련이다. 작가의 묘사는 놀라움 그 이상이었다. 좋아하는 걸 이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어야만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이 될 것 같았다. 그만큼 정성을 들여야만 온전히 '좋음'이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느끼는 페이지였다.


제일 큰 큰오매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큰아버지가 부산 사촌 언니 집에 잠시 와 계셨다. 아흔이 넘은 연세였다. 시골에 홀로 둘 수 없어 모시고 왔지만, 큰아버지는 아들 대신 딸네 집에 있어야 하는 걸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거동도 불편하시니, 혼자 집으로 갈 수도 없다. 딸과 사위에게 아무리 사정해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뿐 정확히 언제 집에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아파트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날이 길어지자 유순한 큰아버지도 성을 내셨다.

"은자야, 큰아버지가 성이 많이 났다. 니가 와서 애교 좀 떨어줘라."

사촌 언니의 부탁이었다. 서둘러 큰아버지에게 가 춤을 추고 애교를 떨어가며 화를 풀어주려고 했지만, 깔딱 요기뿐이었다. 도돌이표처럼 다시 집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이 돌아왔다.

"큰아부지, 집에 뭐 하러 갈라고 그래 자꾸?"

결국 나는 원색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애교에도 까딱하지 않는 큰아버지에 대한 원망이기도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너는 너그 집에 뭐 하러 가노?"'

큰아버지는 대답 대신 고함을 치시며 나에게 되물었다. 너는 너그 집에 뭐 하러 가노? 다 죽어가는 노인 취급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못 움직인다고 깔보지 말란 기백이었다. 여태껏 하이톤으로 까불던 나는 그 물음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놀란 언니와 눈빛을 마주할 뿐이었다.

고향, 집, 그것은 두고 온 또 다른 나였다. 이유가 있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당연히 내가 가야 할 내 자리였다. 해가 지면 돌아가야 할 곳, 내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공간, 가야 할 이유를 묻는 건 존재의 이유를 묻는 것이다. 세상에 그것보다 어리석은 질문은 없을 테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아직 가시지 않는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내 어리석음이 저지른 실수다. 늙음은 나에게 먼 일이었다. 늙음을 헤아리기에 내 젊음은 터무니없이 하찮았다.


'목련의 죽음은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늙음이 처참한 건 목련뿐만 아니다. 인간의 늙음이야말로 생태계 중 최상위의 참혹함이다. 큰아버지의 늙음이 나에게 가장 가까운 현실이었다면, 최근 몇 년 사이에 무수한 늙음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큰아버지 네 분이 모두 돌아가시고 큰오매가 돌아가셨다. 아직 안심하고 있던 내 부모도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늙음에 안착했다. 젊음에 가까워질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고 째깍거리는 초침처럼 하루하루 늙음을 더하고 있다.

잘한다고 했던 무릎 수술은 관절염은 면했지만 새로운 고통을 주었다. 회복되는 동안 근육은 모조리 도둑맞았고 무릎에 넣은 인공관절의 무게마저 짐이 된다. 현관에서 마당으로 내려오는 서너 칸 계단마저 엄마에게 장애가 되고 있다. 또 넘어졌단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코밑에 상처가 나도록 엎어진 모양이다. 누더기가 된 목련이다. 거동하기 힘든 두 노인이 놀란 가슴을 부여안고 서로를 의지해 병원에 다닌다. 알면서도 바로 달려가지 못하는 건 무슨 용기인지 모르겠다. 쓸데없는 전화는 해서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늙음은 잔인하다.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바란다고 이룰 수 있는 꿈도 아니다. 피하고 싶다고 둘러 갈 수 없고 징검다리처럼 건너뛸 수도 없다. 자연히, 저절로, 공평하게 밟아야 할 수순이다.

남은 목숨보다 더 아까운 게 가스 요금이다. 오늘도 두꺼운 옷을 입고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있을 부모를 생각하니 살아낸다는 게 보잘것없단 생각이 든다. 돈보다 안위가 더 중요한 내 젊음과 대비된다. 그분들에게도 청춘과 젊음이 있었을 텐데 짧은 이벤트처럼 스쳐 지났다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를 지나왔고 가지 않은 길을 보여주신다. 결국은 같은 모습으로 당도할 내 미래의 청사진이다.

나도 내 부모도 모두가 처음 겪는 새로운 날이다. 조금 젊고 더 살았고의 차이다. 좋아도 허무한 날인데 불편한 몸으로 되뇔 과거와 미래가 너무 처참하지 않길 바란다. 독백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내가 한심스러워 글에 하소연해 보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 부디 오늘 하루 밥 잘 드시고 무사히 지내길 바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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