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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Dec 20. 2022

천사와 파리

나의 그녀에게...



프란츠의 이러한 돌연한 욕망에 우리는 뭔가 떠오른다. 그렇다, 인간 존재의 극과 극이 거의 닿을 정도로 서로 가까워져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천사와 파리, 신과 똥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차이점이 없게 되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며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달려가 매달린 스탈린의 아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처음 그녀를 봤을 때, 그녀는 날카롭고 금방이라도 찌를 뜻한 인상이었다. 흘깃 스쳐보는 눈길엔 왠지 모르게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보다 앞에 앉은 그녀는 슬쩍 몸을 뒤로 돌려 앉아 들어오는 사람을 무심한 듯 유심히 훑어본다. 요가 매트를 펴고 몸을 푸는 동안 몇 차례 눈이 마주친다. 예의상 눈인사를 나누지만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인상이다. 웃고 있지만 강한 인상을 숨기기엔 역부족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녀가 불편하다. 내가 그렇듯,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도 여전하다. 그러나 이젠 날카로운 눈빛 속에 든 그녀의 상처와 여림을 읽을 수 있다. 인간에게 자기 방어는 본능이다. 그녀는 연약한 몸을 지키기 위해 갑옷처럼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다. 예의 주시하는 눈빛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준비자세다. 그랬음에도 침입한 상처는 헛헛한 웃음으로 치유했고 미처 떨궈내지 못하는 부러움엔 스스럼없이 공격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나와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어울릴 생각하지 않았고 어우러질 거라 생각지 못한 그녀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여전히 같이 요가를 다니고, 같이 고전 공부를 하며, 일주일을 넘지 못하고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자기 몸 편한 것만 생각하던 그녀가 차 없는 나를 기꺼이 데리러 와 주고 어린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이가 되었다.

김장한 이가 수육 삶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아니다, 우리가 초대하라고 윽박질렀다. 우리 중의 왕언니가 십만 원을 내놓으며 수육까지 삶으라고 못을 박았다. 뻔뻔스러워진 우리는 당연한 듯 와인 한 병을 들고 감사히 초대에 응했다. 넉넉한 안주인은 푸짐하게 음식 준비를 해 두었다. 김장 김치를 먹기 좋게 찢어 놓았고 수육도 전골냄비에 넉넉히 삶아 두었다. 배추를 총총 썰어 표고버섯 가득 넣고 지짐 반죽도 한 대야 버무려 놓았다. 들고 온 와인이 무색하게 시골에서 담아온 막걸리가 떡하니 식탁을 차지하고 있다.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다. 웃음을 숨길 필요가 없다. 각기 다른 우리가 어떻게 조합을 이루게 됐는지 문득문득 의아해진다. 서로 다른 다섯이 내는 앙상블이 신기하다. 김장 김치 하나로 쏟아내는 웃음이 과하다. 얼굴 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쏟아낼 이야기가 넘쳐나 줄을 세워야 할 지경이다. 그 중심에 그녀가 있다.

밀란 쿤데라의 글처럼 '천사와 파리', '신과 똥'이 우리의 시간에도 함께 한다. 시끄러운 웃음과 소음이 지난날의 하소연으로 옮겨가는 덴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 인간 존재의 극과 극이 손바닥을 뒤집듯 손쉽다. 천사가 파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여자에게 결혼과 육아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고난이다. 그녀에게 이 일은 그녀의 말처럼 '미친 짓'이었다. 내 몸 하나만 건사하고 직장 다니며 매달 적지 않은 돈을 모으고 충분히 자족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다는 걸 결혼하고야 알았다는 게 실수일 뿐이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가정과 일, 연년생 두 아이를 돌보는 것은 그녀의 몸과 영혼을 착취당하는 일이었다. 엄마에게 퇴근은 또 다른 출근이다. 전당포에 맡긴 것 같은 두 아이를 데려와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한다. 엄마만큼 피곤한 아이는 엄마를 만난 기쁨도 잠시,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잠이 들고 만다. 한 명 업어 집에 눕혀놓고 또 한 명을 데려온다. 자는 게 나은지 깨는 게 좋은지 헷갈린다. 집으로 데려와 눕히면 동시에 두 아이가 깬다. 내 옷은 갈아입지도 못하고 바로 주방으로 가 아이들의 저녁을 준비한다. 온종일 유치원에서 논 아이들은 엄마를 보고 싶었던 만큼이나 배도 고프다. 씻기도 전에 주섬주섬 허기를 채운다. 일터가 생존을 위해 조아려야 할 전쟁터였다면, 두 아이의 생존은 내 생명을 담보로 하는 전쟁의 연장선이었다. 피곤은 하루도 해소되지 못하고 켜켜이 쌓여 갔고 아이들도 그만큼 무거워져 갔다. 공유하고 위로받고 싶었던 남편의 비협조는 이 모든 고난보다 더 큰 어려움이었다. 남편은 결혼 전이나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서나 여전히 자신의 삶에 더 치중했다. 여자에게 퇴근이 새로운 일터였다면, 남편에게 퇴근은 향유와 쉼으로의 초대였다. 일터보다 퇴근 후의 시간에 충실했고 가정으로 출근하는 시간을 지키지 못해 오래도록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부부의 사업이 번창했다는 점이다. 아이들에게 줄 부족한 사랑을 돈으로 해소했고, 해소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남편의 생각은 점점 일에서 멀어져 갔다. 고객들이 채워주는 주머니만큼 고객들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감사보다 그들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의 양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점점 고객과 가정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사업도 시들해져 갔다. 그녀가 제안하는 것마다 남편은 거부했고, 그 많은 고객이 채워준 주머니는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다.

그녀는 억울했다. 달아난 돈이 아니라, 그 돈을 위해 포기한 가정의 단란함, 아이들의 성장, 흘러가 버린 내 청춘에 대한 억울함이었다. 누구도 억울함을 달래주지 못해 남편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마저 하지 못하면 하루를 버틸 힘이 없었다. 잃어버린 그녀의 시간이 바로 우리의 청춘이었기에 눈물을 보탰다.

사 간 와인은 열어 보지도 못했다. 시골에서 받아온 막걸리는 도시의 막걸리와 순도가 달랐다. 두 잔으로도 충분히 천사와 파리를 논하며 늦은 밤을 밝힐 수 있었다.

바람 부는 언덕을 내려온 그녀의 삶이 이제 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연의 색으로 빛을 내기 시작한다. 그 시작을 내가 지켜보고 있다. 미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았던 고개를 넘어섰다. 여기까지 무사히 온 그녀를 안아준다. 새롭게 시작되는 그녀의 날들을 응원한다. 그 삶이 곧 나의 삶이기도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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