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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바깥 Feb 02. 2017

집은 그 사람의 세계관

<프랑스에 관한 기억 3 - 집주인의 취향>

  내가 묵는 하숙집의 주인은 다양한 취향을 가졌는데 켜켜이 쌓인 책과 곳곳에 배치된 남아메리카·아프리카 등지에서 구한 물건들, 벽에 붙어있는 온갖 그림과 사진을 보면서 나는 한 사람의 세계를 엿보는 기분이다. 비록 100분의 1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지만,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 집에 그대로 묻어 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나도 앞으로 내 흔적이 담긴 공간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M이 친구의 집에 초대받은 날, 그 집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마치 네 머리 속에 들어온 것 같아!"라는 말을 했더니 친구가 그렇게 좋아라 했다던데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이 집에는 다양한 영화와 피아노 LP판 등을 비롯하여 이렇게 음악 앨범들도 있다우리 집을 방문했던 음악 광팬 S는 집주인의 JAZZ 앨범들에 감탄하며 젊었을 적 꽤나 약 했을 거 같다면서 손수 선곡을 해주었는데 순간 정말 다른 시공간에 들어선 것 같았다이 집을 찾게 되고또 살게 된 것에 대해 항상 운이 좋았다며 감사하게 된다.(2015.01.02.)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사진 박물관의 큐레이터답게 온갖 사진집이 놓여있었고, 특히 벨빌(Belleville)을 중심으로 하는 20구의 옛 풍경이 담긴 사진집을 나는 탐냈다. 집주인의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로버트 카파의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부터 온갖 사진이 벽을 수놓았다. 어느 날 저녁 미쉘은 소파 근처에서 미술 작품이 담긴 카탈로그를 내게 보여줬다. 어느 작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카탈로그가 수십 권, 혹은 백여 권 여기저기 쌓여있었던 이미지만 남아있다. 거실에는 온갖 대륙에서 가져온 토템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길쭉한 턱을 가진 이, 땡그랗게 눈을 뜨고 있던 이 등등. J는 집안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히피스럽다는 말을 내뱉었고, 집주인은 그 평을 좋아라 했다. 거실의 기다란 탁자에서 온갖 사람들을 초대하여 떠들었다. 공간의 힘은 신비해서 나는 그곳에서 어떤 말이든 떠들 수 있었다. <팀북투 Timbukto>라는 영화가 세자르상을 받던 날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누던 이야기도 희미하게 떠오른다.


  부엌을 지나 방으로 향하는 길목에 이르면 여느 프랑스 가정처럼 꽤 많은 만화책을 볼 수 있었다. 노근리 학살 사건을 다룬 박건웅 만화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미쉘은 새빨간 표지의 <나는 공산주의다 Je suis Communiste>라는 두터운 책을 내게 보여줬다.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다룬 박건웅 만화가의 또 다른 책이었다. 당시에는 몰랐던,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을 비롯한 재즈 음반도 꽉 들어차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에 한 장씩 꺼내 들었어야 했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던 J'는 한참을 LP판 근처를 서성였다. 


 집주인에게는 딸이 있었고, 그녀는 영화를 공부하고 찍는 사람이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남아메리카로 훌쩍 떠나는 바람에 내가 그 집에 머물 수 있었다. 서가에는 볼테르, 루소, 까뮈, 푸코, 들뢰즈를 비롯해 온갖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이 꽂혀있었다. 영화 DVD도 많았는데 덕분에 나는 하네케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책상 앞에 붙은 중동의 지도와 갖가지 그림을 담은 엽서들과 모로코에서 샀을 법한 방석과 온갖 남미 관련 에코백이 떠오른다. 내 침대 맡에는 클림트의 <유디트>가 걸려있었다. 모든 불을 끄고, 침대 위의 조명만 키면 <유디트>의 머리는 어둡고 몸뚱이에만 빛이 비쳤다. 의도한 연출이었다. 이 집에서 머물 수 있었던 3개월의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꿈을 꿨다. 무채색의 화면은 온갖 빛깔로 물들여졌고, 꿈의 소재나 범위도 확연히 달라졌다. 매일 밤 그동안 살아왔던 상상력의 범주와는 다른 세계를 다녀올 수 있었다. 


 이 방을 떠나자마자 신기하리만치 내 꿈의 세계도 쪼그라들었다. 지금 나는 새로울 내 방을 어떻게 꾸밀지 그리고 있다.(2017.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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