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거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SHOOP 리슙 Dec 31. 2023

두 번째 서른셋

대학교에 들어가고 도서관에서 맨 처음 빌려본 책 두 권이 있다.  츠쯔 토모미의 <먹는 여자>, 마리사 아코첼라의 <캔서 앤 더 시티>이다. 재수하느라 만끽하지 못했던 스무 살을 로하고 싶어 뭔가 상상 속 '여자 어른'스러운 느낌의 제목을 골랐었나 보다.


<먹는 여자>는 단편 소설집으로 주로 이별 직후(왜 다 유부남과의 이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혼을 준비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잠깐 만난 이들과 음식이 함께 나온다. 퇴근 후 불도 안 킨 채 싱크대에서 후루룩 까먹는 날계란 간장밥, 야밤에 맥주 한 잔과 먹는 뜨거운 중국식 라면, 바람난 아빠를 찾아갔다가 공원에서 엄마랑 처음 맛본 와인 한 모금, 바람 부는 황량한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카페 등. 고심할 거리가 없어 TV 연속극이나 만화책 보듯이 머리 아플 때 가끔 고는 했다.


2022. 12. 06 책 <먹는 여자> 중


그러다 2022년 12월 즈음 문득 다시 읽고 싶어져 무심코 책을 펼쳤는 깜놀랐다. 소설들 속 몇몇 주인공이 나와 동갑인 서른셋이었던 거다(동안 얼마나 별생각 없이 읽었으면 이제 알았는지..!) 속 그들과 내 근심의 근본은 서로 달랐지만 같 나이라는 이유로 이상하게 마음이 갔다. 스무한 살에 집어든 책이 서른셋의 어깨를 다시 두드릴 줄이야. 원래 이 나잇대에는 오랜 시간 마음을 쏟았던 관계가 단절되는 순간이 몰리나 보다. 그래서 작가도 서른셋을 딱 집었는지도. 싱숭생숭한 연말에 걸맞은 묘한 위로였다.


2023. 08. 08


웃기게도 해가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서른셋이었다. 2023년부터 '한국식 만 나이'가 폐지되서였다. 조삼모사더라도 1년을 더 번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다시 얻은 서른셋을 조금 더 잘 살았으면 좋았으려만. 한동안은 바닥까지 곤두박질치다 아예 이 땅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다행히 더 이상 그런 생각은 들지 않 마지막 날인 오늘 밤새 토를 하고 종일 골골대면서 2023년답게 마무리하는 중이다. 등이 쑤셔 뒤척이는 와중에 떠나간 인연들과 마음들이 맴돈다. 이유 없는 사랑은 가능해도 이유 없는 이별은 불가능하다고 믿기에 이유를 말하지 않고 떠난 이들이 못내 괴로웠다. 그래도 예전에 사랑했던 기억을 끌어모으니 원망 들지 않는다. 이렇게 또다시 떠나보낸다.

올해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조금 더 구별해 낸 거 같다.  내년에는 하고 싶어도 참는 방법을 더 잘 익히고 터득해야지. 2024년에는 모두 아팠던 구석들이 깨끗이 아물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체성은 현재진행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