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과거 (3)
다르지 않은 날이었는데, 달라진 마음은 모든 걸 다르게 만들었다.
의경세자 이장, 평소와 같은 일과를 보는데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강연시간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강사들, 또 이러냐는 시선들을 보내며 한숨을 푹 내쉰다.
“언제까지 이러실려고 그러십니까”
그 목소리는 의경의 귀에 닿지 않는지, 아니면 마음이 외면하는지, 대답이 없다.
강사들도 이제는 지친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런 강사들을 보며 니들이 뭘 아느냐 하는 표정과 마음으로 보는 예지였다.
*
희미한 안개에 하얀 빛이 내려친다. 밤이었나 낮이었나, 날씨도 시간도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시선이었다.
꿈이었던가, 꿈에 그렸던 선배의 모습이 보인다.
주변의 모습이 동아리실과, 학교 주변, 여러 모습들이 필름처럼 스친다.
그때마다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는 선배의 모습이다.
무언가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는다.
좀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다가가는데,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거리도 좁혀지지 않는다. 뛰어보는데 그대로다.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난다.
“꿈인가”
그냥 꿈인가, “조선시대라고 해도 그건 너무하잖아!!!” 쫓겨났던 정은의 모습이 떠오른다. 얼른 쫓아내라던 유생들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뭐, 내 그것들이 과거에 급제하게 그냥 손 놓고 있을 줄 알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발로 이불을 냅다 찬다. 이불이 생각보다 멀리 날아간다.
“여자들이 왜 남자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이렇게 무시 받아야 하는데!!! 왜!!”
이불에 밀린 상이 탁 쓰러지자, 놀란 궁인들이 들어온다. 권신이 놀란 표정으로 검짐에 손을 올린 채 의경을 살핀다.
‘뭐야, 이 사람들은 잠도 안 자..?“
궁인들이 들어와 놀라자, 자신도 놀라는 예지였다. 너무 오버했다. 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한다. 더 이상 그때처럼 우물쭈물해서 후회하는 일을 하고싶지 않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이 땅끝부터 하늘까지였다.
”아무일 아니니, 나가 보거라“
아무일 아닌 게 아닌 증거인 뒤집어딘 상과, 잠자리, 이불 등이 있었지만 궁인들은 조용히 허리를 숙여, 등을 보이지 않은 채 방에서 나갔다.
”잠깐!“
세자의 말에 모두가 행동을 멈추다가, 굳이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지만 시선이 권신을 향하고 있었기에 권신만 남겨놓고 모두가 나갔다.
’한번도 제대로 부른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음 뭐라고.‘
“내가 어떻게 불렀지?”
저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는 표정을 짓는 권신이었다.
“권신이라 부르지 않았습니까”
“내가 평소에 힘들면 어떻게 했지..
”저보다 저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말해봐“
“무술을 하셨습니다. 궁술, 창술, 검술 모두. 최근과 다르게 예전에는 출중하셨죠. 그러다가 강연을 열어 열띤 토론을 하셨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강연은 됐고, 무술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그림을 그려봐야겠어”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세자의 모습에, 정말 뭘까? 하는 생각을 짓는 권신이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고, 더 이상 물음이 없자, 물러나도 되겠냐 물은 후 방에서 빠져나왔다.
달빛이 환했다. 세자의 마음도 환해지길 바라는 권신이었다.
*
날이 밝아졌다. 의경이 궁술과 창술, 무술 등을 하였다. 땀이 비가 오듯 흘렀다. 처음이지만 낯설지 않았고, 생각보다 괜찮은 실력을 뽐냈다. 이런 게 바로 몸이 기억하는 건가? 책이나 만화 스토리에서 많이 봤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생각해 보는 예지였다. 운동이라면 뒤에서 1등만큼은 자신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앞에서 무조건 1등을 떼 놓은 당상이었다.
검을 위아래로 휘두르다, 창을 휘두르다, 아무것도 잡지 않고 주먹과 발을 휘두르다가 그만두었다.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간결해지고 강력해졌다.
큰 도화지에, 짙은 먹과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봐도 비싸 보이는 붓을 준비하고, 붓에 먹을 칠해 도화지로 옮겼다. 처음이었지만 역시 낯설지 않았다. 대단했구나 이 몸은, 그런생각을 하는 예지였다.
그냥 그렸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서였기에 아무 생각하지 않고 그렸는데, 그림은 예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그림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내가 잘 그렸나 싶기도 하면서, 그려진 얼굴에 대해서 애써 지워보려고 했던 그 시간이 담긴, 시간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채윤이었다.
“채윤..”
채윤을 보며 떠올린다. 채윤을 불러 물었던 시간이었다.
채윤이 다가와 인사를 하고
“부르셨습니까 저하.“
”그날.“
”...?“
”날 그렇게 본 이유가 무엇이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하.“
"기억이, 나거든 나는, 본 그 시선이. 잊히지 않는다."
”...“
"말해줘, 그래야, 살 것 같아. "
”...“
세자의 말에 입을 다문 채윤이었다.
무슨 말이었을까. 생각하는 듯 했다.
아니 말해도 되는 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다 힘겹게 말을 꺼냈다.
”슬퍼서 그랬습니다“
채윤의 말이 귀에 닿기도 전에 마음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가슴이 시렸다. 아니 아프다는 표현이 더 적당했다.
할 말이 없어서,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서 그냥 쳐다보았다.
채윤의 얼굴을 보는 의경세자였다.
”슬퍼?“
세자가 자신을 보자, 시선을 바닥으로 주는 채윤이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세자는 무언가를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채윤은 말을 해야 할까 생각했다. 이왕 말했으니 말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게 슬퍼서 그랬습니다.“
문득, 선배가 떠오르는 예지였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싶어 신기했다.
”슬펐더냐“
무겁게 내린 말이었다.
”그랬습니다.“
”슬프냐“
”...“
두 사람의 사이에 벌어진 간격만큼 시간이 흘렀다.
"나도 슬프다."
”...?“
”니가 슬프니까ᆞ 나도 슬퍼“
예지는 순간 이게 사랑인가 싶었다. 조선시대에 이제는 남자인 자신이, 남자를, 아니 고려시대도 이미 남자끼리, 있었자나 하는 생각이 0.1초 정도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두 사람의 대화에 답은 있었을까?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멀리서, 얼핏 들리는 대화 소리에 혹시 들리나 싶어 최대한 안 그런 척, 귀를 기울여 들어 보려는 권신이 있었다. 기울여 들어 보려했지만, 잘 들리지는 않는 듯 싶다가도 왠지 잘 들린다. 좀처럼 걷잡을 수 없는 의경세자의 모습에,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게 되는 권신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던 예지는, 그림을 그리다 일어서서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권신에게 명령했다. 채윤을 부르라고. 권신은 곧장 명령을 수행했다.
*
의경과 채윤이 함께 걷고 있었다.
예지는 채윤과 같이 걷는 이 길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꽃은 피지 않았지만, 꽃내가 향기로웠다.
”너는 언제나 내 옆에 있어라“
문득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말해버려 놀란 예지였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려했다.
”...“
당황한건 예지 본인보다 채윤인 것 같았다.
채윤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선배를 떠 올리며 채윤을 보는 예지였다. 외모를 닮은 건 권신이었지만, 정신을 닮은 건 여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채윤이었다. 권신과 채윤을 함께 본다. 너무 좋다.
”네가 옆에 있어주면 좋을 것 같아“
”...“
예지, 연못가에 도착해 연못에 비친 자신을 바라본다.
의경세자의 모습이 비친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남자인 의경세자의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여자인 예지 본인이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랬다.
연못에 비친 의경의 모습은 건장하다.
연못에 비친 의경의 모습 옆에 채윤이 있다.
문득, 연못을 자세히 보니, 다시 그 옆에 선배, 아니 권신의 얼굴도 보였다.
”둘 다 있어라. 내 곁에“
의경의 알 수 없는 말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있으라는 명령을 받은, 채윤과, 권신이었다.
*
볼일이 끝난 듯 하자, 밀린 업무가 많다며 인사를 올렸다.
가려는 채윤을 붙잡은 의견, 예지였다.
의경세자는 현재 조선의 정세를 채윤에게 물었다. 채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건 저보다 더“
”아니, 너 한테 듣고싶다“
세자의 말이니, 쉽게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자에게 자신이 아는 정도를 말하는 채윤이었다. 속으로는 설마 세자가 눈치 챈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예지는, 채윤에게 그저 말을 붙이고 싶어서 막 튀어나온 거였는데, 의외로 쓸많한 정보가 많았다. 지루한 얘기이기도 했지만 채윤과 함께 있는 시간이기에 그렇게 막 지루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중요한건 지금 하는 말의 내용이 아닌, 채윤과 함께있다는 그저 그 사실 하나였을 뿐이었으니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채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는 의경세자의 모습이었다. 정세가 재밌는 것인지 채윤이 말해서 좋은건지는 약간 헷갈리는 느낌을 주변도 받는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지는 않는다. 아니 못한다. 사랑에 빠진 얼굴로 채윤이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의경세자, 예지였다.
*
채윤의 말을 듣고 가뭄이 들어 고생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구제를 나서는 예지였다. 배ᅟ객성들 발 디딜 틈 없이 줄 서 있는 모습이고, 이대로면 오늘 하루 종일 나눠 줘도 줄이 끊기지 않을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채윤의 말을 듣고 줄을 나누고, 관아 바깥으로 쌀을 옮겨 여러 군데서 한 꺼번에 나누어 준다.
“이건, 병렬과 직렬, 이래서 병렬이 좋은 거구나”
예지는 정작 학습시간에는 외면했었던 지간 배움의 시간을 떠올려보았다. 뭐든 배우면 쓸때가 있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그런건 별로 쓸 때 없을 것 같은데 투정부렸던 자신이 있었다. 정말 쓸때가 생길줄은 정말 몰랐으니까.. 정상참작이 가능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
세자와 채윤은 그 후에도 계속 어울려 다녔다. 그런 소문은 궁궐에 빠르게 퍼졌고, 어느새 사람들은 채윤을 찾아 고민을 털어놓았다. 세자가 채윤을 예뻐하고 자주 찾는다는 얘기를 듣고 세자에게 연줄을 되고 싶어서 그러는 사람들이 많았다.
채윤에게 사람들이 말을 걸고, 가까이 지내려 노력했다. 사람들이 채윤에게 몰렸다. 채윤은 매번 귀찮다고 생각하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능력이 좋으면 굳이 줄을 잘 서지 않아도 높게 쓰이는 법이라 생각했다. 대호군의 사례처럼, 본인도 자신이 일을 잘하니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세자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서 가까이 두는 것인가 불안하기도 했다.
*
둥궁의 밤은 늘 깊다. 깊은 마음은 채윤을 만나고 오면 조금은 가벼워져서 지난 과거에서 있었던 일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는 예지였다. 그래도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아서, 힘을 소비해야겠다 생각하고 검무장으로 가 권신을 상대로 무투를 벌였다.
권신과 무술을 연마하는 와중에 권신의 얼굴이 선배와 겹쳐보인다. 우둔 밤이라 다른 빛들이 모두 사라지고 권신을 비추는 빛이 유독 밝아서 그런건가 생각해보는 예지였다.
선배의 얼굴을 보자, 잡고 있는 검을 놓치는 예지였다. 숨을 헐떡되며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나 그래도 많이 늘지 않았니?”
세자의 무언가 어딘가, 구멍이 있는, 이상한 맒투에, 이제는 좀 적응이 되는 것 같기도하다. 예전에 오히려 더 대단했는데, 죽을뻔한 아픔의 위기를 넘기고 하향된 검술에, 다시 실력이 늘지 않았냐고,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한 말에, 권신은 굳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다.
“많이 늘었습니다.”
“우리 사냥갈까?”
“사냥이요..?”
“채윤도 부르고.”
“...”
생각만해도 벌써 신이난 예지였다. 좌 권신, 우 채윤, 생각만으로 배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