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봄 사냥, 그리고 저마다의 기척
[13화: 봄 사냥, 그리고 저마다의 기척]
사냥을 가자던 의경세자의 한마디는, 동궁 사람들을 적잖이 긴장하게 만들었다. 전부터 몸이 편치 않아 시강이며 궁무(宮務)를 종종 거르던 세자가, 이제 막 몸을 추스른 뒤 뜬금없이 사냥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한 설명을 들을 틈도 없이 의경이 준비를 재촉하자 신하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강원 강사들은 아직 풀지 못한 학문 과정을 어찌할지 골머리를 앓았고, 호위무사들은 세자의 안전만을 염려했다. 동궁전 안팎이 하루아침에 들썩였으나, 그 와중에 의경의 얼굴은 묘하게 밝았다. 마치 오랜 감기로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바깥공기를 한껏 마실 수 있다는 아이 같은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날도 의경은 해가 뜨기 전, 창 너머의 기척을 살폈다. 감싸 안은 이불이 조금 더 따스하게 느껴지려는 찰나에, 벌써부터 동궁에 울리는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냥을 위한 활, 화살, 군마, 그리고 호위 인원까지 모두 출발이 임박한 듯했다.
“준비가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의경은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깨자마자 중얼거렸다. 무술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건만, 요즘은 조심스러운 시선들이 더 늘었다. 궁 안팎에선 “세자저하께서 어서 회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크기도 했거니와, 덕분에 작은 야외 나들이조차 대대적인 행사처럼 변해버렸다.
“저하, 대령했습니다.”
권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고개를 살짝 들어 의경을 살피는 그의 눈에는 어젯밤 검무장 훈련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기색이 어려 있었다. 분명 말릴까 하다가, 의경이 계속 고집하니 그냥 따르기로 한 모양새였다.
의경은 슬쩍 시선을 돌려 방문 입구로 걸어가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사냥, 별일 없이 잘 마치면 좋겠는데. 사실 그냥 바람 쐬고 싶을 뿐인데.’
그런 내면을 들킬 수 없기에, 의경은 어깨를 약간 펴고 의젓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동궁 바깥에 나서자, 여럿이 오와 열을 갖춰 의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익위사와 궁녀들, 그리고 이번 사냥에 동행할 몇몇 신하들까지 꽤나 거창한 인원이 모였다.
“저하, 나오셨사옵니까.”
앞장서 있던 관리 하나가 깍듯이 인사했다. 의경은 형식적인 예를 무심히 받아 주면서도, 옆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여 찾는 사람을 확인했다. 채윤은 어디쯤에 있을까. 이 사냥 일정에 누가 동행 신청을 했고, 또 누가 빠졌는지 직접 보고받은 적은 없어서 궁금했다.
그때 기척이 느껴졌다. 채윤이 무리 뒤편에서 살짝 몸을 숙여 예를 갖췄다. 눈이 마주치자, 채윤은 예의상 수그린 채 시선을 거두었다. 그 모습이 왠지 더 반듯해 보였다. 예조의 문관이라는데, 얼굴은 물론 태도도 단정해 의경이 괜히 미소 짓게 되었다. 그러나 그 미소를 오래 표출하면 눈치 빠른 권신이나 주변 사람이 뭔가를 의심할 것 같아, 의경은 재빨리 다시 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가자.”
세자의 짧은 한마디와 함께, 일행은 대열을 정비했다. 말을 타는 위치, 마차를 따르는 이들, 모든 것이 예규에 맞게 정비되어 있었다. 사냥은 원래 소규모로 간소히 갈 수도 있지만, 세자가 직접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자칫 세자가 흉수를 만나거나 낭패를 볼 일이 생기면 책임이 큰 까닭이었다.
의경은 문득 말고삐를 잡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선 세자, 생각보다 번잡하구나.”
근처에서 잡담 소리를 들은 권신이 뭔가 반응하려 했다가, “예, 저하”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칫 하면 세자를 꾸짖듯이 답하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것을 본 채윤은 약간 당황한 듯, 속으로 ‘세자저하께서는 평소에 이런 말씀 잘 안 하셨다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역시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얼마 전부터 세자저하의 말투며 생각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을 터. 채윤은 그저 오늘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집중하기로 했다. 혹시나 사냥터에서 벌어질 만약의 상황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할 수도 있고, 세자저하가 필요로 하면 곁에서 도움을 드려야 하므로.
말 편성이 마쳐지고, 기다리던 무리들이 북소리를 가볍게 울리며 밖으로 나아갔다. 대궐 문에서부터 호위병들이 앞뒤로 배치된 가운데, 그 뒤를 권신과 다른 무관들이 뒤따르며, 그 뒤 채윤 등 문관들이 잇따랐다. 의경은 맨 앞에서 말 위에 앉아, 바라보는 이들에게 은근히 기세를 뽐내는 듯이 보였다.
물론 의경 세자의 마음속은 살짝 복잡했다. ‘정은은 어떻게 됐을까. 요즘 과거시험 이후로 재등장을 안 했는데, 혹시 다시 쓰러진 건 아닐까. 그래도 채윤과는 조금씩 눈을 맞추게 되었고….’
그런 생각을 해도 입 밖으로 말하지 않으니,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냥터 입구, 들판 근처
한나절 정도를 쉬지 않고 이동한 뒤, 일행은 조금 넓은 들판에 도착했다. 양쪽 숲이 우거진 언덕 사이에 펼쳐진 너른 평지였다. 해는 아직 중천에 있었다. 과연 세자가 나들이를 즐기기엔 적절한 시각과 장소였으나, 사람들은 괜히 긴장한 기색이었다. 왜냐하면 원래 왕족의 사냥이라 함은 군사 훈련을 겸하거나, 아니면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을 때 열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저하, 사냥을 행차하시기 전에, 잠시 안배할 일이 있어옵니다.”
세자익위사 쪽에서 나와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의경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무 엄격하게 진행하지 말라. 그냥 바람 쐬러 온 것이니.”
이에 세자익위사 장령이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렇사오나 혹시 숲에 맹수가 있을까 하여 대비를….”
“맹수라. 본래 사냥이란 거, 맹수를 잡고자 하는 게 아닌가.”
의경은 조금 장난스럽게 말하고, 곧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채윤이 혹시 어디 있나 싶어서, 채윤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넬까 싶어서. 그러나 의경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채윤이 아니라 권신이었다.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권신은 벌써 검을 반쯤 꺼내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다들 숨도 못 쉴 기세로군.” 의경은 중얼거리다가 조심스레 말을 돌아보았다. “권신, 너도 좀 편히….”
그 말에 권신은 살짝 표정을 풀긴 했으나, 긴장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는 살짝 말고삐를 당겨 세자 가까이 이동했다.
“저하, 오늘따라 기운이 넘치십니다. 사냥이라면 좋지만 혹여 다른 구설수 생길까 염려됩니다.”
이야기를 듣던 의경이 작게 웃었다.
“구설이야. 내가 뭘 하든 생기지 않겠나. 그러니 너무 개의치 말고, 나를 믿어라.”
그러고 나서 의경이 채윤을 불러 보려다, 채윤이 이미 곁에서 지켜보는 걸 확인하고는 쑥스럽다는 듯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혹여나 권신이 이상하게 볼까 싶었다. 헛기침이 목에서 나왔다.
“음, 일단 너희가 미리 사냥 지점을 살펴보거라. 난 말에서 내려 잠시 길을 걸어보고 싶다.”
‘왕족이 사냥하겠다고 해 놓고 말을 내려 걷겠다니’, 대부분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세자의 말에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호위병의 일부분이 세자를 따라 천천히 주변을 함께 걸었고, 또 일부는 숲 속을 먼저 살피러 전진했다. 의경은 원래라면 틈틈이 시강원에서 배운 사냥 절차를 상기해야 했을 텐데, 사실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여기 온 김에, 마음 편히 채윤과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 아니면 권신이 함께 있어야 할 텐데. 둘 다 있으면 또 이상하게 보려나.’
그런 생각에 빠져 있으니,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잠시 놓쳤다. 산들바람이 불어 들었고, 언뜻 들판 너머에서 날아드는 새의 울음소리가 귀를 건드렸다. 한동안 바람 결을 느끼고, 멀리 하늘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의경은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한편, 문득 ‘정은’이 떠올랐다. ‘이런 맑은 풍광, 정은이라면 “조선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여성도 더 많은 걸 누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텐데….’
“저하, 괜찮으십니까.”
양옆에서 당번 내시 둘이 소곤거리듯 물었고, 의경은 뒤늦게 허리를 세워 걸음을 멈췄다.
“어디 이상해 보이냐.”
“아니옵니다. 다만 멍하게 하늘만….”
“머리가 좀 어지러울 뿐이다. 괜찮다.”
의경은 괜히 그런 핑계를 댔다. 내시들은 세자가 원래 몸이 안 좋다 소문이 자자하니,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묻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얼마 전까지 병석에 누워 있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숲 언저리, 첫 번째 사냥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인솔하던 관리들이 의경에게 잠시 쉬었다 가시라며 자리를 마련했다. 숲 길로 입장하기 전, 원래라면 간단한 예를 차린 뒤에 멧돼지나 노루 같은 짐승을 몰이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유생들의 말로는 “높은 분의 사냥이라 함은 곧 군사 훈련”이라고도 하지만, 오늘 세자는 전혀 그런 데 흥미가 없어 보였다.
권신과 몇몇 무관이 앞장서서 숲길을 살피고, 채윤은 그 후미에서 대신들의 지시를 정리해 문서를 작성 중이었다. 어디에 이르러 몇 마리 짐승을 유도하여 세자가 활 시위를 당길 것인지, 나중에 잡은 고기를 어떻게 관리할지 등. 사실 채윤은 이런 일에 큰 흥미는 없었으나, 어쩔 수 없이 맡은 역할이었다. 문관에게 이런 실무가 떨어지기도 하나 싶었지만, 세자의 눈에 들면 별별 일이 다 맡겨지곤 했다.
그런데 그토록 여러 문서에 정신 팔려 있던 채윤이 고개를 들자, 바로 눈앞에 세자저하가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채윤이 허둥지둥 일어나려다 종잇더미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아니옵니다. 저,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다.”
의경이 몸을 숙여 떨어진 종이들을 주우려 하자, 채윤이 재빨리 더 낮게 엎드려 그걸 주워 담았다. 전혀 조선시대 세자와 하급 문관 사이의 행동처럼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다. 주위에 있던 자들은 살짝 당황했으나, 의경이 별말 없으니 그냥 넘어갔다.
약간 수습이 되자, 의경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계속 무슨 서류를 적느냐. 벌써부터 지루해 보인다.”
“사냥 일정을 정리 중이옵니다. 어느 시점에 무리를 어떻게 나눌지….”
어딘가 갸웃한 표정을 짓는 의경은 문득 종잇더미를 바라봤다.
“너무 딱딱하구나. 사냥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복잡했나.”
“통상, 전하 혹은 세자저하 께서 나가시며 안전 문제, 민가와 충돌 우려, 사냥감 관리, 뒤처리 등을 신경 쓰느라 그렇습니다.”
채윤이 체계적으로 대답하자, 의경의 눈빛이 반가움과 피곤함을 동시에 띠었다.
‘아, 이 사람은 정말 문관이 맞긴 맞구나.’
한편으로 의경은 채윤에게 불쑥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날 과거시험장에서 그 여인을 보고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었는지, 자세히 듣고 싶다.’ 하지만 주위 시선이 있으니 대놓고 채윤을 붙들고 사적인 얘기를 하긴 어렵다.
의경은 안타까운 마음을 꼭 참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그… 오늘 사냥은 어쩌면 별 사냥감 없이 돌아갈지도 모르겠는데, 너희가 괜히 고생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저하, 저희가 편하길 바라시면 그 또한 성은이옵니다.”
“하하.”
의경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조선시대 세자답지 않은 행동이 튀어나올까 봐, 곁에 있는 사람들을 흘끔거리다가, 얼른 몸을 돌려 권신이 있는 쪽으로 갔다. 채윤이 한 번 그 뒤를 훑어보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 ‘어딘가 묘한 세자저하….’
사냥 대열이 산등을 넘어가려는 시점
본격적인 수풀 지대에 접어들자, 선발대가 고함을 지르며 멧돼지를 몰아내려 했다. 노루나 사슴이 나오면 좋으련만, 요 몇 년간 이 일대에 멧돼지가 더 많다는 소문이 있었다. 세자는 비교적 앞선 위치에서 활을 당길 준비를 갖췄다. 권신과 무관들이 사방으로 배치되어 언제든 세자가 위험해지면 달려들 태세였다.
“저하, 거칠게 뛰어드는 놈이 나타날지도 모르오니 조심하십시오.”
“그래.”
의경은 관심 없다는 듯 대답했다. 어느새 활을 든 채 안장 위에 일어섰고, 숲 가장자리에서 인기척이 달려오는 기미를 살폈다. 잠시 후, 바스락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모습이 나타났다.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가 뛰쳐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번이야말로 사냥이라면 사냥답게 할 수도 있으니, 주변 무관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세자저하가 제대로 활 시위를 잡아본 지도 꽤 된다는 소문이었는데, 괜히 놓치면 우스운 꼴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저하, 저 짐승이옵니다!”
권신이 서둘러 외쳤다. 의경이 활 시위를 당기려는 순간, 말이 크게 흥분해 앞으로 달려들었다. 생전 처음 겪는 움직임에 의경이 균형을 잃었다. 원래 의경세자가 무술에 일가견이 있다곤 해도, 최근의 몸 상태나 “예지의 영혼” 문제로 예전만큼 자연스럽진 않았다.
자칫 말에서 떨어질 뻔한 찰나, 권신이 빠르게 반응해 고삐를 붙잡았다. 그 순간 멧돼지가 또 다른 방향으로 튀어, 대열의 후방 쪽으로 달렸다. 거기엔 채윤이 문서를 들고 따라오다 말고 멈춰 선 채 깜짝 놀라 있었다.
“위험합니다!”
문관 몇 명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채윤이 허둥지둥 피하려 했지만, 멧돼지가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운 각도로 파고들었다. 한순간만 늦으면 채윤의 하반신이라도 들이 받힐 듯했다.
“채윤!”
의경이 본능적으로 활을 당겼다. 시위를 세게 잡아당겨 멧돼지를 조준하기에는 좀 무리였다. 채윤 바로 옆을 지나칠 각도라, 자칫 빗맞으면 채윤이 맞을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세자익위사나 무관들이 간신히 달려오고 있으나, 이미 멧돼지는 채윤 코앞까지 돌진해 버렸다.
의경은 활 끝을 조금 낮추고, 숨을 멈춘 뒤 힘껏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쉭 하고 소리를 내며 날아갔고, 멧돼지의 등 언저리에 정확히 꽂혔다. 한 치라도 빗나갔으면 큰일이었겠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명중이었다. 멧돼지가 고통에 울부짖으며 채윤 쪽으로 완전히 쓰러지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무관들이 재빨리 창을 찔러 마무리했다.
“아악….”
채윤은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피와 비명소리를 피해 자세를 낮췄다. 무관들이 멧돼지를 제압하니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옆에서 의경이 말을 몰고 달려왔다.
“채윤, 다치지 않았느냐.”
세자가 채윤 쪽으로 다가와 얼른 내려서 손을 내밀자, 채윤은 그제야 깜짝 놀라며 눈길을 들었다. 사지가 멀쩡한 걸 확인하고, 의경이 안도했다. 주변 무관들은 모두 “저하께서 명중시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느냐”고 술렁였다. 채윤이 멧돼지에게 부딪혔으면 크게 다쳤거나 목숨조차 위험했을 수 있다.
동시에, 몇몇은 ‘세자저하의 궁술 실력은 여전하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최근 세자저하가 몸이 약해졌다는 말이 많았는데, 그래도 한 번에 명중시킨 것을 보니 예전 실력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숨을 돌린 뒤, 의경은 채윤에게 조용히 물었다.
“괜찮소.”
“예… 저하, 괜찮습니다. 제가 방심을…”
채윤이 쑥스러운 듯 말끝을 맺지 못하자, 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들 앞에서 더 말을 길게 하긴 어려웠다. 그저 부축하듯 채윤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권신이 다가와 채윤을 살피면서, 동시에 의경에게 예를 갖췄다.
“저하, 여기서 잠시 멈추고 쉬시는 게 어떠할지… 이미 멧돼지 한 마리가 잡혔으니, 오늘 사냥 목적은 달성되었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리 해도 되겠지. 나도 별 욕심 없으니.”
의경이 하긴 시큰둥한 듯 승낙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사고 없이 넘어갔으니 다행이다. 세자익위사 장령은 땀을 식히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세자저하가 몸이 온전치 않다고 하더니, 활 쏘는 감각은 어디 안 갔다. 하지만 채윤이라는 문관이 위험에 처하는 장면을 본 건 오랜만이군. 별 탈은 아니겠지.’
누군가는 채윤과 세자저하 사이에 이상한 감정이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다들 그럴 겨를이 없었다. 큰일 날 뻔한 사건 직후에는 대체로 바쁘게 수습하기 마련이다.
일행은 숲 안 깊숙이 더 들어가 보려 했으나, 이미 사건이 벌어졌다. 세자저하 몸 상태도 고려해야 하고, 채윤이 놀란 상태에서 더 진척하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 나왔다. 사냥이랄 것도 없이, 멧돼지 한 마리로 끝났지만, 의경 본인도 별 상관없다고 했다.
오후 무렵에 일행은 근교에 마련된 임시 진영(천막 몇 개가 쳐진 자리)으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필요한 경우 하룻밤 묵고 갈 수 있게 꾸며 둔 곳이다.
채윤은 사고가 난 뒤 계속 얼굴이 창백했다. 피를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 아니겠지만, 오늘은 자기 목숨이 아찔하게 위태로웠으니, 그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을 터. 그래도 업무상 문서를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권신이 어느 틈에 의경에게 다가와 작게 말했다.
“저하, 채윤에게 특별히 휴식을 허락하심이 어떠합니까. 지금 저 꼴은….”
“음. 그럴까.”
사실 의경도 같은 생각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채윤, 괜찮소? 좀 쉬시오”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사소한 한마디조차 주위 눈이 거슬렸다. 벌써 몇몇 대신들은 ‘세자저하가 채윤을 유독 신경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걸 의경도 눈치챘다.
하지만 굳이 숨길 일도 아니다. 채윤은 소중한 문신이자, 오늘 멧돼지 사건에서도 죽을 뻔한 사람이니, 세자가 관심을 보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의경이 시중드는 내시를 불러서 조용히 지시했다.
“채윤 저 사람, 조금 쉬라고. 오늘 문서는 다른 문관이 도우면 되겠지.”
그렇게 채윤에게 휴식 명령이 떨어졌다. 채윤은 멈칫하며 “감사하옵니다, 저하”라고 머리를 숙였다. 마음 한편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다. 두근거림, 고마움, 그리고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움.
‘왜 세자저하가 나만 신경 쓰는 것 같지. 아니, 나뿐 아니라 누구라도 다쳐서는 안 될 테니….’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방금 전 쓰러져 있던 자신에게 손 내밀던 세자저하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네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전해지는 듯한 절박함. 채윤은 부지불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채윤, 이리 와 보게.”
그 사이 의경이 문득 직접 채윤을 불렀다. 주위 사람들은 일부러 바쁜 척, 혹은 다른 일 하는 척하며 그 장면을 흘끗 보았다. 채윤은 다시금 예를 갖추고 나아갔다. 세자저하 곁에는 권신만이 있었다. 의경이 낮게 묻자, 채윤이 황급히 대답했다.
“괜찮은가.”
“예, 저하. 아주 멀쩡합니다.”
“거짓말 마시지. 벌써부터 손이 떨리는구만.”
“….”
“피도 어느 정도 봤을 텐데. 당분간은 글 써야 할 일도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채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를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끼치기는. 내가 활 잘못 쐈으면 네가 다칠 뻔했고, 오늘 일행 중 누구라도 위험해졌을 것이다. 여기서 끝났으니 다행.”
그러고는 더 말을 붙일까 하다가, 의경은 곁에 권신이 있음을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상황을 파악한 권신이 일부러 몸을 돌려 주변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의경이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은 별달리 할 말이 없지만, 저물기 전에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괜찮겠나.”
“예? 저….”
“내가 시킬 일이 있다 기 보다, 그냥… 겁먹지는 않았는지 보고 싶다. 혹은 차를 마시며 얘기 나눌 수도 있고.”
채윤이 순간적으로 당황해 “예, 저하”라고 답했으나,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세자저하가 왜 이리 다정하지.’ 바로 옆에 권신이 있는데, 혹시 무슨 오해를 부를까 걱정되면서도, 채윤 스스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설렜다.
그 장면이 길어지면 곤란하겠다고 판단했는지, 권신이 소리 내어 기침을 작게 했다. “음, 저하, 밖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행차를 조금 일찍 끝내야 한다는 보고인 듯합니다.”
의경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길로 채윤에게 ‘곧 돌아가 보라’고 한 뒤, 전령을 맞이하러 걸음을 옮겼다.
임시 진영 옆, 해 질 녘 무렵이 되었다.
보고를 받은 결과, 예정에 없던 일들이 또 발생했다. 세조께서 갑작스러운 회의를 소집했다는 전갈이었고, 세자는 내일 새벽에는 궁에 돌아가야 할 듯했다. “하룻밤까지야 머무를 수 있지만 더는 곤란하겠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일행은 분주하게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결국 의경이 처음 생각했던 ‘느긋한 사냥’은 이대로 끝난 셈이다.
그날 저녁 식사 무렵, 의경은 조용히 채윤을 찾았다. 일부로 공식 명령처럼 부르는 게 아니라, 권신이나 시중 내시 몇 명 정도만 알게 “채윤이 잠깐 들라 하라”고 시켰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권신이 조금 의아해했지만, 감히 물을 수도 없는 일이라 묵인했다.
채윤이 의관을 단정히 하고 들어왔다. 세자전이라고 할 만한 천막 속, 배치된 병풍과 간소한 좌석이 있었지만 사방이 좁은 편이라, 어쩐지 가까운 분위기가 되었다. 의경은 차를 준비하라 내시에게 지시한 후, 나가 있기를 부탁했다. 권신도 마찬가지. 호위무사는 문 밖에서 대기할 뿐, 내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단둘이 됐다. 채윤이 긴장한 기색으로 앉았고, 의경이 다소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서릿발 같은 조선시대의 예의범절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예기가 전혀 없는, 오로지 두 사람의 호흡만 감도는 공간이었다.
“거참, 내가 굳이 이렇듯 너를 부른 게 이상할 수도 있겠구나.”
“…괜찮습니다, 저하. 위험한 일이 있은 뒤에 불러 격려해 주시려는 것이라 짐작합니다.”
채윤이 일부러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야 서로 편할 테니까.
“그래, 그리 생각해도 좋겠다.”
의경이 웃었다.
“내가 아까 말했잖나. 너 많이 놀랐을 것 같아서. 낯빛이 하얗더군.”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아남았지요.”
“그건 내가 활을 잘 쏜 덕이 아니고, 네가 행운이 있었던 거다.”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웃음을 지었는데, 대화는 거기서 잠깐 끊겼다. 의경은 무심코 채윤의 손등을 본 뒤,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손이 가늘고 결이 곱구나. 남성 관리 치곤 좀….’ 그러나 바로 생각을 접었다. ‘괜히 의심스럽게 보면 안 돼. 채윤이 남자 문관이긴 해도, 어쩌면 체질이 약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의경 자신에게는 ‘남녀 구분’이라는 거 자체가 이제 더 이상 크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예지의 영혼으로 살게 된 이후로, 남장이든 여장이든, 그 사람의 능력과 성격이 더 중요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으니까.
“음… 채윤, 요즘 예조 쪽 일은 어떤가. 보통 과거시험이 끝나면 정신없다고 하던데.”
채윤이 조금 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우왕좌왕이었는데, 그 과거시험 날 벌어진 소동(정은이 난입)이 심상치 않아, 예조 대감들과 대신들이 바짝 예민해 있지요. 세자저하께서 여성에 대한 문호를 더 열고자 한다는 말도 돈다 싶으니, 다들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의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명이 과거를 치르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호들갑이면, 여성 관원을 대대적으로 등용하려 할 땐 얼마나 더 소란이겠나.”
“소란이 아니라, 반발이 클 것 같습니다.”
채윤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본인도 근래 여성 차별을 직접 목격한 뒤부터 더 생각이 많아졌다. 여성이라서 과거를 못 친다는 건 어느 한 사람을 넘어, 구조적으로 차별 아닌가. 하지만 이걸 함부로 말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일쑤였다.
의경이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채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성이… 아니, 아예 남녀 구분 없이 실력만 좋으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고 하면, 나라가 흔들릴 거라고 보나.”
“…저는, 반드시 흔들린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재능 있는 이들이 활약한다면 백성에게 득이지 않겠습니까.”
“역시… 네가 그런 소신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채윤은 무슨 말인지 곱씹다가, 세자저하가 “역시”라고 말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에 대해서 어느 순간부터 이런 믿음을 갖고 있었나. 채윤 스스로는 차마 끝까지 시선 못 들어, 바닥에 시선을 두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다만, 맹렬히 반대할 자들이 많을 겁니다. 세자저하께선 분명 많은 벽에 부딪치실….”
“그 벽은 어떻게 깨면 좋을까.”
채윤은 그 답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책만 읽어서 되는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전하(세조)와도 상충될 테고, 보수적 신료들은 ‘문란해진다’고 들고일어날 겁니다. 정은 같은 사람을 늘리려면, 그저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더 치밀한 준비와 세력 결집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세력 결집….”
의경이 중얼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그럼, 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진 분들을 찾아서, 비밀리에 파악한다면 어떨까.”
“네?”
“단, 너무 성급하게 하면 안 된다. 상대가 누군지 확신하기 전까진 조심스럽게 움직여야지.”
이건 거의 임시 밀명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채윤은 눈이 커졌다.
“저, 저하. 굳이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의경세자 직속 관리들은 많으니, 더 신뢰할 만한 이도 있을 테고….”
“난 네가 믿을 만하다고 느끼니까. 너 또한 여성들의 일에 무관심하지 않은 듯하고.”
이 말을 들은 채윤이 괜히 얼굴이 후끈해졌다. ‘여자’였으니 당연히 여성 문제에 민감하지만, 그 정체를 말 못 했다. ‘내가 정말 여잔데, 세자저하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구나’ 싶었다.
“알겠습니다, 저하. 저 같은 자라도 필요하시다면….”
“고맙다. 힘들면 언제든 말해도 좋다.”
그건 거의 맹약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의경이 잔으로 차를 권했을 때, 채윤은 살며시 마셨다. 따뜻하게 식지 않은 차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가슴 한복판이 이상하게 울컥하며 열렸다.
그렇게 한참 서로 뭔가를 나누다, 천막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권신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고, 세자익위사 장령이 “저하, 잠시 뵙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얼핏 들어보니, 내일 새벽 일정을 다시 상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경은 잠깐 ‘하, 귀찮군’ 하며 시선을 채윤에게 건넸다.
“어쩔 수 없네. 나가보마.”
“예, 저하.”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윤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의경이 잠시 뒤따랐다. 천막을 나서자, 앞에는 세자익위사 장령이 예를 갖추고 있었다. 곁눈질로 보면 채윤도 허리를 숙여 지나갔다. 의경이 잔뜩 아쉬운 표정으로 채윤의 뒷모습을 한번 보았다가, 장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미세한 순간을, 권신은 놓치지 않았다. 이 호위무사는 속으론 ‘세자저하가 자꾸 채윤에게 마음을 쏟는 군…’ 하고 생각했으나, 공적으로 간섭할 수는 없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동이 트면 궁에 돌아가야 한다. 별다른 사고 없이 사냥이 마무리된 것도 다행이지만, 생각보다는 수확이 없는 여정이었다. 의경세자(예지)는 해가 설핏 설핏 사라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곁에는 늘 권신이 지켰다.
서너 걸음 뒤, 세자익위사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대부분 각자의 천막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거나, 혹은 세자를 떠날 준비를 검토하느라 분주했다.
의경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조용하군. 갑자기 멧돼지가 튀어나오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권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세자가 진심으로 ‘이제 그만 돌발사태는 일어나지 마라’ 하는 듯했다.
“저하, 행차가 어지간히 피곤하셨나 봅니다. 이러다 병세가 재발하면…”
“뭐, 재발 안 하도록 내가 스스로 관리 해야지.”
의경은 고개를 슬쩍 돌려 천막들 사이를 훑었다. 어디 채윤이 지나가고 있나, 혹은 다른 신하들이 모여 떠들고 있나. 그러나 어둠이 깔린 데다 모두 각자 휴식을 취하는지라 눈에 띄는 인물은 없었다.
이윽고 멀리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 얽혀 들리는데, 문득 의경은 이곳저곳 둘러보며 말없이 걸었다. 구중궁궐에 갇혀 있을 때와 달리, 탁 트인 야외의 밤공기는 확연히 시원했다.
걷다가 어느 작은 천막 앞에 다다른 순간, 내부에서 은은한 불빛이 세어 나왔다. 의경이 시중 내시에게 저게 누구 텐트인지 묻자, 내시가 살짝 당황하며 답했다.
“그곳은 주채윤 나리와 예조 관원 몇이 함께 머무는 자리 같습니다.”
“하, 그렇구나.”
의경은 괜히 마음이 동해 그 앞에서 멈칫했다. 그러자 권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했다. 세자가 굳이 여기서 뭘 하려는 걸까. 그러나 의경은 깊게 호흡만 하고 돌아서는 듯 보였다. 내시와 권신이 안도하는 틈에, 천막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채윤이 밖으로 나오려는 지,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마주칠까, 의경도 모르게 설렘이 번졌다. ‘어떻게, 이러다 딱 눈이 마주치려나.’ 그런데 실제로 문이 젖혀지자 고개를 내민 건 채윤이 아니라 예조의 다른 관원이었다. 젊은 관원이었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세자와 시선을 마주치자, 깜짝 놀라 무릎 꿇었다.
“아, 아… 저하.”
“일어나라. 괜찮다.”
의경은 짧게만 대답하곤, 이내 “난 이제 돌아볼 데가 있어 여기까지 왔을 뿐”이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권신에게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뭔가 더 대화를 나눌 상황도 아니었다. 괜히 밤늦게 채윤을 따로 불러내는 건 더 수상할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 앞에서 ‘세자저하가 채윤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라는 말이 돌아봐야 의경에겐 득 될 일이 없었다.
“이만 가서 쉬자.”
그리하여 의경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쯤 천막 안에는 채윤이 없는지, 소란 없이 조용했다. 아마 채윤은 다른 일 때문에 밖에 나가 있는지, 혹은 아예 다른 천막에서 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경은 살짝 서운했다. 사실 조금은 채윤과 더 마주치고 싶었는데, 운명이랄지 상황이랄지,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조선의 세자라는 자리도, 예지로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도, 모두 어긋남 투성이라고 느껴졌다.
‘그래도 목숨이라도 무사해 다행인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마무리하며 의경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아무 말없었고, 별빛이 엷게 깔렸다.
다음 날 새벽, 귀로의 시간이었다.
긴 말을 줄지어 전진하고 있었다. 해가 채 뜨기 전 출발하여, 이른 시각에 대궐로 들어가려는 계획이었다. 사냥은 어영부영 끝났으나,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무사 귀환이라는 명분이 있는 셈이었다.
의경은 행렬 맨 앞에 있었다.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는데, 한편 시선을 그리 가깝지 않은 곳에 둔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누가 말을 걸어도 짧게만 대답했고, 권신은 옆에서 혹여 세자가 말에서 또 떨어지거나 하진 않을까 조심스럽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저하, 지치십니까. 말에서 내려 잠시 쉬실까요.”
“괜찮다.”
의경은 경쾌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생각이 많아 잠도 설쳤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몸은 괜찮았다. 대신 마음이 좀 답답했다. 돌아가면 곧바로 세조를 뵈어야 하고, 그다음엔 정무를 봐야 하며, 그 틈에 채윤에게 부탁한 일을 서서히 꺼내야 한다. 정은의 행방도 알아봐야 한다. 머릿속이 바쁘니 오히려 피곤할 새가 없다.
행렬 한가운데에 채윤이 있었다. 예조 관원들과 함께 이동하며 중간중간 문서를 확인했다. 이번 사냥 도중 잡힌 멧돼지 처분, 혹은 세자의 안전 문제 보고서 등. 늘 업무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채윤의 머릿속에도 다른 것이 가득했다.
‘어제 세자저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 결국 여성 관리를 늘릴 의지를 확실히 하신 건가. 나를 믿어주겠다고 하셨다. 이 시점에 내가 해야 할 역할은….’
채윤은 문득 멈춰 있었다면, 뒤에서 다른 관원들이 “채윤 나리?” 하고 부를 만큼 무아지경이었다. 결국 정신을 다시 붙잡고, “아, 미안하오” 하며 고삐를 다잡았다. 이대로 궁에 돌아간 뒤 곧장 서류와 몇몇 자료를 파악해야 할 터였다.
도성 입구, 아침 무렵이었다.
도성 문이 열린 시간대라, 백성들도 장사나 생업을 위해 드나들고 있었다. 그 무리 사이로 호위대가 나아가니 사람들은 길가로 비켜섰고, 세자를 태운 행렬이 좀 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지나갔다.
다만 의경 입장에서는 화려한 환영을 기대하지 않았다. 굳이 안 해도 된다 생각했지만, 관리들은 “그래도 세자께서 오랜만에 밖에 다녀오신 뒤 복귀하시는 것이니, 백성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며 약간의 의전을 준비한 듯했다.
평소라면 의경도 불만이 없었을 텐데, 지금은 괜히 귀찮았다. 그래도 백성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니, 마냥 굳은 표정을 짓기보단 가볍게 미소 지어 보였다. ‘내가 세자라는 것, 참 여러 면에서 귀찮구나. 그러나 백성들에겐 내 존재가 중요할 수도 있지.’
백성들 사이에 아이들이 보였다.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세자일행을 보는 아이들. 혹여 나중에 궁에 들어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 아이들 중 여아도 많을 텐데, 이 시대 여아들은 관직을 꿈꿀 수나 있을까.
‘아직 갈 길 멀구나.’
그날 아침, 의경은 조용히 결심했다. ‘앞으로 조금 씩이라도 바꿀 테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채윤, 정은, 세녕공주, 심지어 해양대군 등등 여러 인물이 얽혀 있겠지. 세조 역시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어쩌면 그때가 되면 예지라는 ‘나’의 영혼도 완전히 이 시대에 스며들어, “조선의 여성부”라는 결과를 꽃 피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게 예지가 바라는 궁극의 목표 중 하나였다.
궁궐 도착 직후였다.
말에서 내린 의경은 곧장 내전으로 향해야 했다. 세조가 대기를 하고 있다고 하니, 미룰 수도 없었다. 일단 해양대군, 세녕공주, 각 대신들이 준비해 둔 절차가 있을 듯했다. 사냥 결과 보고를 비롯해, 세자의 건강상태 등을 확인해야 하니.
내전에 가는 길목에서, 의경은 멀찍이 뒤를 따르는 채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조 관원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는데, 수고로움이 얼굴에 드러나 보였다. 밤낮없이 문서에 치여 있었고, 사냥터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에도 바로 복귀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기특하게도 채윤은 “힘들다”는 기색 없이 살짝 웃으며 다른 문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도 다행이군. 네가 무사해서.’
의경 세자(예지)는 작은 안도와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권신이 잠자코 세자를 호위하며 움직였다. 이제 곧 마주하게 될 세조의 표정이 어찌 변할지는 모른다. 이번 사냥에서 큰 소득 없이 돌아온 걸로 뭐라 할지, 혹은 별다른 언급이 없을지.
그리고 어쩌면, “해양대군이 그간 궁 안팎에서 무슨 말을 하고 다녔는지”에 대해 보고를 받을지도 몰랐다. 그가 애초부터 대놓고 의경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어디선가 슬며시 세력을 모으는 지는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궁 복귀 후: 세조를 만나야 하는 시간이 왔다.
내전에는 이미 세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관료 몇 명과 함께 간단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경이 들어서자, 신하들이 모두 절을 했다. 의경도 예를 갖추며 걸어 들어갔다.
“돌아왔느냐.”
세조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진심으로 안심한 것인지, 아니면 형식적으로 하는 말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예, 아바마마. 별 탈 없이 돌아왔습니다.”
“잘했다. 몸은 어떠하냐.”
“그럭저럭입니다.”
의경이 대답을 건네는 사이, 선유명 등 예조 쪽 인물도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가 ‘사냥 결과 보고’를 대신해서 전하께 설명하려는 듯했다.
세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유명이 나서서 말했다.
“성은이옵니다. 이번 사냥 중 특별한 전리품은 없었지만, 멧돼지 한 마리를 획득했고 큰 사고 없이 무사히 행차를 마친 점이 다행이라 하옵니다.”
“그래. 많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세자가 바람 쐬는 정도면 충분하지.”
세조가 다시금 의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약간은 흥미롭다는 듯 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멧돼지가 튀어들어 어수선했다는 말이 들리더구나. 세자가 직접 활을 쏴 제압했다고.”
“네, 우연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냥을 제법 했다는 소리로구나. 몸이 아직 안 좋다는 소문이 있던데, 활 시위는 잘 당기더냐.”
옆에서 보던 신하들이 깍듯이 “세자저하께서 명중하셨사옵니다”라고 거들었다. 세조가 가벼운 흥미를 보이며, 의경을 스르륵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음, 슬슬 몸을 추스르고 다시 국본으로서 활발히 움직이려나. 과거시험 일에도 관여했었지. 한낱 여성의 난동(?)이라던가….”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과거시험이 무사히 끝났고, 오히려 보람이 있었다 생각합니다.”
의경이 짧게나마 반박하듯 말하자, 세조가 살짝 수염을 만졌다. 주변 신하들은 말을 아꼈다. 이거 괜히 세조와 세자가 또 충돌하면 곤란하니까. 하지만 세조는 크게 화내지도 않고, 그저 미소 비슷한 걸 지었다.
“우선은 알겠다. 너도 피곤할 테니 물러가서 쉬거라. 내 나중에 다시 너와 얘기할 게 있도다.”
“…예, 아바마마.”
의경은 다시 절을 올린 뒤 물러났다. 해양대군이나 세녕공주는 보이지 않았다. 공주 처소 혹은 대군 관소에 있나 보다. 이처럼 세조가 곧 “다시 얘기하자”고 한 건, 며칠 내에 어전 회의에서 뭔가 안건을 올릴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동궁으로 돌아온 의경은 크게 한 숨을 내뱉았다.
마침내 동궁에 들어서니, 동궁전 사람들은 일제히 예를 갖추며 “돌아오심을 환영합니다, 저하”라고 했다. 의경이 고개 끄덕이며 들어가니,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사냥을 위해 잠시 떠나 있던 며칠간, 이곳도 나름대로 사건이 있었다고 하지만, 의경 입장에서 궁금한 건 딱 하나였다.
‘정은의 행방은? 과거시험 이후로 소식이 없던데, 혹시 다친 곳이 있는지, 아니면 별다른 사고가 생긴 건지….’
동궁 시중드는 이가 슬쩍 “저하, 들어오신 김에 목욕 물이라도 준비해 드리겠습니까” 물었으나, 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시 남은 업무부터 확인하마. 지나간 보고서와 문서를 좀 가져오라.”
동궁비서(시강원) 관리들이 분주하게 문서를 챙겨왔다. 의경은 그것들을 하나씩 넘겨보며, “정은”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대목을 찾았다. 예상했던 대로, 시험장 이후로 ‘여성 장원 급제자’에 대한 상소가 쏟아졌고, 예조 입장에서도 처리가 쉽지 않아 보였다. 보고서 말미엔 “정은이 원체 지친 상태라 당분간 휴식하겠다는 소문이 있다”는 정도의 짧은 문구가 덧붙어 있었다.
“결국 정은이 조정에 들기 전부터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구나.”
의경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궁 안에 들어온 이상, 어찌 된 일인지 문무백관이 일제히 반발할 여지도 크다는 걸 잘 안다. 정은이 ‘여성 관리 1호’라 불릴 수 있는 인물이니만큼, 앞으로도 더욱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 채윤이 정은과 친분이 있음을 떠올렸다. ‘채윤이 알면 뭔가 소식을 듣고 있을 텐데.’ 그럼 곧 채윤과 만나 이 문제도 상의해야겠다. 하지만 조금 전에 사냥터에서 부탁한 ‘조용히 사람들을 파악해 달라’는 사안도 있고, 채윤을 너무 자주 만나면 의심받을까, 어쩔지 고민되었다.
‘우선, 며칠 간은 신중히 움직이자.’
그 결론을 내리고, 의경은 서류를 덮었다. 그러자 몸이 나른하게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며칠간 말 위에서 이동하다 보니, 진이 빠진 모양이었다. 간만에 이불을 덮고 푹 쉬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외부 보고를 받다 보면 또 시간은 흘러갈 테지.
현대(예지)의 시절 같았다면, 여기서 기지개라도 편하게 켜고 “아, 힘드네. 배달음식 시켜 먹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정말 다른 시대다. 이제 이런 생각도 익숙해지려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권신이 살짝 귀기울여 “무슨 일 있으십니까”라고 물어왔다. 의경은 고개를 들어 권신을 봤다.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적어도 이 사람(권신)은 나를 믿고 옆에서 늘 지켜주니까.
“별일 아니다. 그냥 사냥 다녀온 뒤라 피곤하군. 잠깐 눈을 붙이면 안 되겠나.”
“그리 하시지요. 시강원 일정도 일단 오후로 늦췄습니다.”
“고맙군.”
조선시대 세자가 ‘고맙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도 어색할 법하지만, 권신은 이미 익숙해진 듯 별 반응이 없었다. 다만 마치 ‘이분이 정말 얼마 전까지 병약하던 세자저하가 맞나’ 싶은 눈빛만 살짝 비췄다.
그렇게 의경은 동궁의 편전 한쪽, 가마솥처럼 푹신한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 혹여 꿈속에서 또 다른 예지의 모습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요즘엔 꿈을 꾸면 늘 두통이 함께 찾아와서 겁나긴 했다. 그래도 몸이 너무 피곤하니 어쩔 수 없었다.
한낮이 조금 지난 시각, 채윤이 잠시 동궁에 들렀다. 사냥 보고서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해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시강원 관리 중 하나가 받으면 그만이지만, 채윤은 아침 내내 예조 쪽 일과 겹치느라 직접 가져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시강원 쪽에서 “세자저하께서 곤하게 주무신다”라는 말을 듣고, 채윤은 망설였다. 문 밖까지 왔으나, 직접 전달하는 건 무리겠다 싶어, “그럼 일단 대기하겠다”고 했다. 한동안 기다리며 시중내시들과 적당히 담소를 나눴다.
내시가 힐끗 채윤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채윤 나리, 그래도 오늘은 표정이 조금 낫군요. 어제는 좀 피곤해 보이시더니.”
채윤이 약간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저야말로 감사히 쉬었지요. 저보다 세자저하께서 피곤하실 텐데.”
“그러게요. 만약 멧돼지 사건이 크게 터졌으면 어떡하실 뻔했습니까.”
“하하.”
둘 사이의 대화는 그 정도로 끝났다. 채윤은 머릿속으로 ‘이따 세자저하가 깨어나시면 꼭 뵐 수 있을까. 혹은 문서만 남기고 가야 할까.’ 하고 생각 중이었다. 사실 어젯밤, 세자저하와 나눈 대화들이 계속 마음을 울렸다. 심장이 뛰고, 혹시 또 뭔가 ‘은밀한 명령’을 내리실까 싶어 의아하기도 했다.
조금 더 기다리자, 시강원 강사 중 한 명이 와서 도장을 찍어갈 서류를 확인했다. 이 사람이 “굳이 채윤 나리가 직접 세자를 뵐 필요 없이, 내가 이 문건을 전하께 전하겠다”고 제안했다. 채윤은 망설였다.
“세자저하께서 주무시는 중이라면, 저도 기다려야 할 이유가 크진 않지요.”
“그럼 일단 맡겨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결국 채윤은 그 문서를 강사에게 넘기고,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예조 업무가 태산 같으니, 헛되이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문득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세자가 깨어나면 이 서류를 볼 것이고, 더 할 얘기가 있다면 뒤에 불러줄 수도 있을 테다.
‘그렇다고 내가 계속 여기서 기다리다간, 뻔히 티 날 것 아닌가. 괜히 의심 사기 딱 좋지. 그래, 이쯤이 안전하겠다.’
채윤은 스스로 마음 정리하고 동궁을 나섰다. 하지만 복도 끝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속마음 깊숙이 미세한 아쉬움이 삐져나왔다.
한편, 의경: 짧은 꿈이 이어지고 있었다.
“세자저하, 세자저하….”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이건 시강원 강사의 목소리가 아니라, 더 멀리서, 미래에서. 예지가 좋아했던 선배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은 느낌. 의경(예지)은 꿈속에서 어쩐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형체들, 모래시계가 또 한 번 깨지는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깨진 유리 조각에 비친 얼굴은 ‘의경’이기도 하고 ‘예지’이기도 했다.
“누구지… 어디 있어….”
꿈속에서 아무 대답이 없다. 그리고 이내 자욱한 안개가 사라지는 듯하더니, 어두컴컴한 텅 빈 교실, 아니면 궁궐 계단 같은 곳이 나타났다. 그 주변에 그늘처럼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자세히 보면 해양대군 같기도 하고, 혹은 전혀 다른 낯선 남자 같기도 했다.
“형님….”
그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무렵, 의경은 등을 돌리고 뛰어갔다.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안 돼… 난 여기서 죽을 수 없어’ 하고 머릿속으로 외쳤다.
마지막 순간, 어딘가에서 “세자저하!” 하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려왔고, 의경은 그 소리에 화들짝 깨버렸다.
의경이 벌떡 일어나니, 권신이 옆에서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하, 악몽을 꾸신 겁니까.”
식은땀에 이마가 축축했다. 의경은 이불을 걷어차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하, 또 이상한 꿈이었나 보군.”
“오늘 고단해서 그리 된 듯합니다. 좀 더 주무셔도 되는데, 시강원 강사가 방금 서류를 전하고 갔습니다. 보고 처리해야 할 듯합니다.”
“벌써… 채윤이 가져온 문서인가.”
“예, 들은 바로는 채윤 나리가 조금 전에 직접 왔다고. 다만 저하가 깊이 주무신다 하여 그 문서는 시강원 측에 맡기고 돌아갔답니다.”
의경은 몸을 일으키다 멈춰 섰다. ‘채윤이 다녀갔다고?’ 하필이면 잠들어 있어 못 만났다니, 더 기이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어쩌지, 내가 한 번 불러볼까? 그럼 티가 날 텐데.’
“시강원에 있나, 아니면 예조로 돌아갔나.”
“아마 예조 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서류를 확인해야 하니, 의경은 머리를 감싸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시큰거렸으나, 낮잠을 조금 자서인지 의식은 또렷해졌다. 한껏 미뤘던 일들이 머리를 압박했다. 곧 정은의 일도 챙겨야 하고, 해양대군 동태도 살펴야 하고, 채윤에게 부탁한 ‘어떤 인물들’ 정보를 서서히 기다려야 한다.
한편으로 의경 마음 한구석엔, ‘왜 난 채윤과 마주칠 기회가 이렇게 어긋나는가’ 하는 괜한 서운함이 남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감정을 표출할 수 없다. 일단 하루이틀은 바쁘게 보낼 수밖에 없을 터. 시강원이나 예조의 보고를 받고, 세조의 부름을 기다려야 한다.
“권신, 일단 시강원으로 갈 테니 함께 오라. 서류를 보면서 나도 생각 좀 정리해야겠다.”
“예, 저하.”
그렇게 다시 분주한 동궁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의경(예지)은 먼 곳을 한번 바라봤다. 채윤이든 정은이든, 그리고 아버지 세조든, 멀찍이 각자 위치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조용한 일상이 언제까지고 이어지진 않으리란 걸 의경은 알고 있었다.
‘큰 파도는 반드시 온다.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
사냥은 끝났지만, 의경이 꿈꾸는 개혁은 이제부터 제대로 시작되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