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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과거 (2)
긴 밤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예지였다. 처음으로 치루는 관리자의 역할, 감독관의 자리는 은근히 많은 긴장감을 불러왔고 그 긴장감에 짓눌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신이 멍했다. 혹시나 실수라도 할까 봐, 역사 속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을 자신의 실수로 못 이끌어 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엄청나게 들을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는데 세자의 자리라는 중압감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과거란 이런 분위기인가? 시험장으로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시끌벅쩍 떠들고 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과거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더 긴장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필생즉사 사필즉생이라고 아직 이 말을 한 장본인은 태어나지도 않았을테지만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하면 살 것이라고 말했던 그 열기가 과거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에 비해 하늘은 청명했다. 너무 맑아서 구름이 한 점이 없었다. 참 맑은 하늘이었다. 자연스럽게 내리친 햇빛에 비친, 권신의 얼굴을 몰래 엿본다. 햇빛을 엿보는 밤의 달처럼 가장 빛나보였다. 하늘의 모든 청명함을 땅에서는 저 권신이 모두 가져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멋있다..”
세자의 체통은 예지가 그 몸을 차지하고 난 이후부터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은 분명했다. 권신은 애써 자신에게 ‘멋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세자를 의식하지 않고 무시하려고 했다.
과거시험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문에서는 난리가 난듯했다.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옥신각신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시험장의 정문에 이상하게 마음이며, 시선이 쏠렸다.
아까부터 난리였다. 예지가 무슨 일이지 살피자, 관리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듣지 못할 것을 들은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그중 채윤의 표정이 가장 어두웠다. 저런 아름다운 외모로 어찌 칠흑을 머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지는 손짓으로 채윤을 불렀다.
“어찌 안색이 그리 안좋은가?”
“.. 아닙니다”
예지의 물음에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얼버무리는 채윤의 모습에, 예지는 여자의 직감으로 아주 큰일이 있구나를 직감한다. 아마 그 일은 저기 저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하여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려는데 예조의 관리가 와서 이제 시험을 시작해야한다고 알린다.
순간 멈칫한 예지는 알겠다고 끄덕거리고 시험의 시작을 알린다.
마침내 오랫동안 준비한 과거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오랜 기대를 했던 다른 한 사람, 아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문이 닫히자, 마지막 힘을 내어 냅다 달렸다.
닫히던 문 사이로 들어왔다. 예지도 그를 보았다. 정은이었다.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여기 과거시험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확실하게 다른, 여자였다.
놀란 예지, 의경의 모습이었다. 권신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 정은에게로 걸어가고 있는 사이였다. 놀란 병사들이 어찌할 바를 처음에는 모르다가 날뛰는 정은을 제압하기 위해 등 뒤에서 몽둥이로 내려쳤다. 정은이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의경이 놀라 일어섰다. 세자가 일어서자 관리들이 앞으로 튀어 나왔고, 그 모습을 보고 시험을 준비하려던 사람들도 웅성거리다 한 곳으로 응시하게 됐다. 세자의 시선을 따라 모두가 채윤을 보게 되었다.
밖에서, 난리를 치던 그 여자였다.
“저 미친년, 아직도 안갔네?”
“부정 타게, 저게 뭐야 시바”
그 소리를 들은 채윤이 부들부들 거리며 그 말을 꺼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맞고 있는 정은을 보다 못해 금방이라도 나설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예지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위기의 상황에 엄마의 모습을 확인하려고 하는 아기처럼, 예지는 자신도 모르게 권신과 채윤을 보게 된 것이었다.
병사들이 정은에게 몽둥이를 계속 휘두르고 있었다. 권신이 다가가며 크게 소리쳤다.
“멈춰라!”
병사들이 놀라 행동을 멈추고 권신을 보았다. 병사들이 행동을 멈추자 권신이 세자를 보았다.
“어,, 이.. 이건”
권신이 자신을 보자, 뭐라고 말을 해야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다. 어제 너무 긴장해서 잠을 못 잔 참이었을까, 그때 옆에서 예조의 한 관리가 나와서 말을 했다.
“저하, 어서 쫓아내버리고 시험을 시작하셔야합니다.”
자신에게 말을 건 예조의 관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다친 정은의 모습을 보았다. 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살아는 있는 건가 싶었다.
“다친 거 아니냐, 몽둥이로 맞았는데”
그때, 예지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세자에게 소리치는 유생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외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성한 과거시험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더한 벌도 아깝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금 같은 시간이 흐릅니다”
뭐지? 뭐야?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게 맞는 건가? 아, 여기는 조선 시대라서 그런 거지. 여자가 맞았는데 그냥 시험을 시작해? 아니 사람이 맞았는데, 조선시대라서, 그런건가? 그런거겠지. 근데 왜.. 맞아야 하는거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결단을 내려야했지만 아무 결정을 할 수 없었다.
“그, 그래. 시험을 시작하자”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때 문득. 예지의 생각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가득찼다. 바로 그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하는 바람이었던건지, 의견을 바라보는 채윤의 눈은 눈가에 맺힌 건 분명 눈물이었는데. 시선을 마주하자 바로 피하고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였다.
이 순간에 뭐지, 쿵하고 그 찰나의 순간이 박혀버렸다.
채윤의 시선이 남아버렸다. 마치 오랫동안 아파할 추억하나를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머리를 가격당안 정은,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나간다. 바깥으로 끌려 나와진 정은은 그대로 던져진다. 바깥쪽, 쓰러져있던 정은은 시간이 좀 흐르자, 힘이 났는지 다시 일어서서 닫힌 문 쪽으로 걸어가지만, 그전과 같은 힘은 없었다.
*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피로 얼룩진 시험장 바닥, 이후에도 몇 번이나 시험장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 정은이 달려들었고, 그걸 또 병사들이 얼마나 많이 저지했는지, 발자국과 정은의 핏자국이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멸시의 눈빛을 보내던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는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동정 가득한 시선을 느낀 정은은 그래도 일어 다시 가고, 병사가 잠시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시험장 안으로 들어선다.
닫힌 문 사이로 다시 정은이 들어오자, 당황해하는 시험장 안의 사람들이었다. 그중 세자가 가장 크게 당황해보였다.
신료들과 유생들과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이 하나 같이 큰 목소리로 어서 쫓아내고 과거를 예정대로 치러야한다고 주장한다.
예지는 머리가 지근거렸다. 여자라고 시험을 못 치는 게 말이 되나 싶은데, 여긴 또 조선이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권신은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모두가 자신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채윤은, 채윤의 시선은 무언가를 원하는 것 같은데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인지, 헷갈렸다. 그 무언가가 바로, 저 여자를 쫓아내지 말아 달라는 신호로 보였다. 그런 슬픈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내가 세지나까, 내릴 수 있는 명령을 내려야 할 때였다.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어려워지는 문제였다. 그때였다. 그림으로 많이 보던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어서 쫓아내라!”
자신의 시조라고 알려져 있는 사람, 선예지의 시조, 선유명이었다. 지금은 예조의 관리 중 하나로, 계유정변 때 지금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이 나라의 왕이기도 한, 세조를 도왔던 사람이었다.
예지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유명을 보았다. 그 뒤 차례로 보이는 권신과 채윤의 얼굴들이었다. 권신이 선배로 바뀌어서 예지에게 다가온다.
선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선은 진작 망했어야해! 여성을 핍박한 죄로!”
다시 살펴보면 권신이다. 움직이지도 않았고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시선을 돌려 채윤을 보면, 다 포기한 듯 눈을 질끔 감고 있었다.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른다. 왜 이렇게 다 어려운 것 투성이지 투덜되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선배도 없었고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예지 자신 뿐이었다.
도로, 다시 끌려가고 있는 정은이었다.
세자, 털썩 주저 안 듯 자리에 앉는다.
손이 머리를 향하지만 체통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참아보았다.
이장으로 살겠다던 어제의 결정이 떠 오른다.
바꾸겠다던 그 맹세가 스친다.
‘그래, 나는 이장이다’
눈을 찔끔 감는다.
깜깜하다.
저 멀리서부터 밝게 비쳐오는 빛이 있다.
자세히 보려고 해도 안 보이는데 점점 밝아진다.
“네가, 의경세자 이장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예지가, 자신이 지금 바로 이장이라고 하는 애기였다.
눈을 뜬다.
상황은 끝나있다.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허탈한 감정에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채윤이 보고싶지만 마주할 용기가 안 난다. 권신이 보고싶지만 부끄러웠다.
*
과거시험장에선 사람들이 과거를 치룬다.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고 열심히 답을 쓰고 있었다.
반쯤 정신을 잃은 표정으로 세자가 사람들을 둘러본다.
이제 다 끝난 일인거겠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어딘가 불편하고, 불안했다.
*
어느새 깊은 밤이 찾아왔다. 과거는 끝났고, 모두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자신의 답을 적어갔고,
부디 그 답이 임금의 답에 근접하기를 바라면서 발길을 돌려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예지는 방에 홀로 남아 눈을 감고 생각했다.
바둑의 한 판이 끝나고 한 수 한 수를 돌려보는 복기의 시간처럼 오늘 있었던 일을 돌려 보려고 하고 있었다. 정은의 출몰, 자신이 바꾸려했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 그로 인해 보게 된, 채윤과, 권신의 시선.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몸도 남자, 그 둘도 남자, 제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지, 자신의 몸이었다면, 본인이 그 몸 그대로라면 바로 취했을텐데라는 생각을 하다가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지 생각했다. 분명히 아주 진지하고 불안한 고민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두 사람의 생각으로 잠시 혼돈이었던 머리가 평정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이전 이 몸의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일기를 쓰는 예지였다.
눈을 감으니, 채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을 그렇게 바라봤던 채윤이 지워지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묻고 싶어 말을 건네려하면
깨지는 상상이었다. 쓰려던 일기에는 채윤이라는 글자밖에 없었다.
“하아”
자연스럽게 한 숨이 세어나왔다.
“그대, 어느새 내 마음 가져간 것인가요...”
일기장 앞에, 멍하니 붓을 들고 있는 예지였다.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느냐”
혼자 물었기에, 대답이 없었다.
묻고 싶은데...
묻지 못하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
병사에게 끌려나와 강하게 뺨을 맞는 정은, 힘에 못이겨 날아가고, 고꾸라지는 모습이었다.
“뭔 미친년이 지랄이야”
계속해서 도전하는 정은, 시험장 안에서는 빠르게 시간이 흘러 시험지를 제출한 몇 명이 나간다. 의경 옆에 있는 채윤을 슬며시 보는데 매우 슬픈 눈을 하고 있다.
*
시험이 끝나고 동궁으로 돌아오는 길,
의경, 채윤을 떠 올리며 정은도 떠 올린다.
정은이 끌려 나가는 장면을 너무도 슬프게 바라보고 있던 채윤의 시선.
그런 채윤을 보는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의 시선처럼 떠 오른다.
“여자라는 이유로 과거를 못 보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지?”
“...”
권신이 깜짝 놀라는 표정과 묵음으로 세자를 보았다.
권신이 대답하지 않자 선배와 오버랩 되는 권신의 얼굴이 온전히 권신이 된다.
“그게 무슨 이치에 맞지 않는-.”
“...”
기대했던 대답과 다른 말.
이상하다.. 느끼면서 궁궐, 동궁으로 가고 있는 예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