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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과거
2016년, 2009년, 2004년, 1990년, 1987년, 1980년, 1979년, 1960년, 1950년, 1948년, 1919년, 1894년, 수많은 시간대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 여성들의 색은 회색이었다. 그런 여성들에게 색이 채워진다.
그날 모든 곳에 여성이 있었다.
지금도 모든 곳에 여성이 있다.
시간은 빠르게 거슬러 1457년이 되어지고,
역성의 시간이 시작이었다.
*
세자의 시강원, 의경, 공부하면서 다른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강사들이 세자를 다그치면 그때뿐이었다.
“곧 전하께서 보고를 원하실 겁니다.”
못 들은 건지, 척인지.
“저하, 집중하셔야 합니다.”
질문하는 신하를 보고, 다시 질문한다.
“자네들 내가 바꾸고 싶으면 바꿀 수 있는 거?”
놀란 모습의 시강원 강사들.
“그럼, 당연한 거 아닌가, 넌 장차 나라의 왕이 될 자다.”
강사들이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다 서둘러 절을 올린다. 늦게서야 주상전하 납시오, 라는 소리가 울린다. 강사들 놀라서 서둘러 엎드려 절한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강사들을 뒤로 한 채, 세자를 바라보는 세조였다.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세조를 마주한 것은 놀란 예지, 세조를 본다. 어물쩍, 선배가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 권신을 보다가 다시 세조를 보았다.
“문제가 있느냐?”
의경 세자에게 세조가 물었다. 허나 대답은 강사들이 했다. 일체 “아니옵니다. 전하”라며.
*
해가 비추고 있는 궁궐은 낮 동안 계속 소란스러웠다. 상소문 때문이라고 했다. 누군가 올린 상소문의 내용 때문에 매우 소란스러웠다. ‘방직기’와 ‘부민 고소금지법’ 에 대한 폐지를 청한 상소였다. 예지가 듣기론 방직기는 무인에게 내리는 여노비였고, 부민고소금지법은 낮은 사람이 윗사람을 고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아직 잘 모르겠으니 조용히 사태를 파악하려고 하는 예지였다. 무술이 재미가 있어서 수련장으로 가 권신과 합을 겨눈다. 처음엔 검도 제대로 잡지 못하던 예지였지만 어느새 10합을 넘게 권신과 맞상대가 되고 있었다. 검이 생각보다 잘 맞아서 더 재밌는 느낌이었다. 이게 시강 보다는 백배는 더 재밌었다. 왜 드라마의 날라리 군주들이 무술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가만히 두질 않으니까 그 중에서 차라리 무술이 낫다. 싶었다.
“이제 좀 나으십니까”
“뭐..가?”
검을 고쳐잡은 권신이 의경에게 물었다.
“최근 힘들어하셨지 않습니까. 검도 못 잡으시고.”
“괜찮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뭐, 즐겨야지”
“예...?”
“너가 있어서 괜찮은 것 같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있어 줄 거지?”
권신이 검을 바닥으로 찍고, 한쪽 무릎을 꿇고 외쳤다.
“오직 저하를 지키는 일에 이 한 몸 모두를 받치겠습니다!”
권신이 외친 외마디에 예지도 검을 내려놓고 권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괜히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저 권신이라는 호위무사 덕분에 혼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게 되고 있었다.
*
늦잠을 자는 세자를 깨운다고 난리인 동궁의 사람들이었다. 왜 이렇게 야단법석이냐고 예지가 더 자고 싶어서 베개를 끌어안으면, 이제 몸이 괜찮아지셨으니 강연에 들라는 어명이 있었다고 지금 뭐 하시냐고 난리인 사람들, 예지는 그런 게 뭐 대수냐고 더 자려고 하다가 말로 뚜드려 맞는다. 이 사람들, 자신을 세자로 보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깨어나 서둘러 뛰어가는 예지였다. 그런 중요한 거라면 진작 말했어야지! 하는 철부지의 모습이었다.
강연장에 도착하자 수많은 대소신료가 나란히 옆에 서 있었다. 세자는 늦어서 제일 끝자리인 종 9품 관리 옆에 서는데, 종9품의 관리가 놀라서 세자를 보면, 세자가 씩 웃으며 손짓으로 인사하자, 내시가 논라 나와서는 ‘저하, 자리로 가시옵서서’ 간청한다. 그러면 그 내시에게 귓속말로 ‘내 자리가 어딘데’ 말하여 물어보면, 내시가 이게 뭐시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통해 알려준다. 내시가 알려준 자리는 맙소사, 왕의 옆, 세조의 옆 자리였다. 아...
“여기 있으면 안 돼?”
내시의 두 눈이 이렇게까지 커지는구나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세조와 의경을 한 번씩 보다가 말을 하는 내시였다.
“아니 되옵니다. 저하. 체통을 지키시옵서서.”
“아니,, 그놈의 체통 맨날 지키래. 그래 알았어. 갈게 가!”
세자가 툴툴되면서 내시가 알려준 자리로 간다.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 가자, 신하들이 말을 이어간다. 이게 강연이구나, 한다. 재미없는 나랏일들이 쏟아진다. 어제부터 난리가 났었던 부민고소금지법과 방직기에 대한 폐지에 관해서 얘기가 나오자 모두가 결사반대하며 그 상소를 올린 사람을 추포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세조는 생각에 잠긴 채 대답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 얘기하도록 하지, 준비는 잘 되고 있는 가?”
세조의 말에 모두들 그에 대한 얘기를 멈추었다. 이게 왕의 힘인가 싶은 예지였다. 중요한 안건이란 게 또 뭘까, 준비를 철저히 하는 모양이니 정말 중요한 건 가 보다 생각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저 사람은 누군데 얘기하는 걸까, 다들 그러고보니 누구냐, 이 많은 사람들 언제 다 외우냐 이런 생각이 드는 예지였다. 그런데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이 몸의 주인 입장에선 아버지, 이 나라의 왕, 세조의 시선이었다.
“세자도 준비를 잘 하고 있는 가?”
???, ‘무슨 준비...?’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당황한 예지였다. 이런 제길,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온다고? 동방예의지국이라면서 이렇게 예의가 없어도 되는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까 그 사람이 말했다.
“세자께서는 최근 몸이 안좋으셔서, 저희 예조가 곧 보고를 올릴 예정이었습니다. 이번 과거시험에 대해서는 아직 최종 논의를 함께하시지 못하였습니다.”
저사람은 예조에 관한 일인가 보다 생각하는 예지였다. 예조는 뭘까, 그리고 잠깐 뭐라고 과거시험? 나 과거도 봐? 세자인데? 세자가 과거도 봐야하나? 라는 생각이들었다.
“준비는 잘 되고 있는거겠지? 세자?”
예조의 말을 들었으면서 다시 묻는 저의가 뭘까, 진짜 세조 짜증나네, 선배의 말이 동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세자저하께서 최근에 병안으로 잘 실피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조가 잘 준비해뒀으니 그날 확인만 하시면 됩니다.”
저 사람, 뭔데 두 번이나 말을 하는거지, 하면서도 고마웠다. 당신, 내가 딱 기억해두겠어. 라고 생각하는 예지였다. 예판과 세조를 동시에 보는 예지, 아직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다행히 과거시험을 예지가 보는 건 아니었고, 최종 감독관의 역할이었던 것 같았다. 내가 그동안 이렇게 높은 관리를 맡은 적이 없는데 잘할 수 있을까? 아니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바꾼다고 생각했으면서 이 정도에 무너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
과거 시험장을 둘러보는 예지엿다. 자신이 과거시험‘장’으로 임명된 사실 때문에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시험장을 둘러보았다. 평범해서 뭐 할건 특별히 없어 보였다. 당일날 뭔가 처리만 하면 되는 건가 싶었다. 현대의 행사들처럼 명령하고 시키고 그러면 되는 건가 싶었다. 국가공무원시험이랑 같은거겠지? 생각하였다.
“과거시험, 어떻게 하면 되는걸까?”
“평소대로 하시면 됩니다.”
권신에게 조언을 구해보지만, 조언답지 않은 대답을 들었다.
“그 평소가 어떤데”
“...”
권신은 요즘 세자가 미는 컨셉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뭔가 싶은 표정으로 보는 게 요즘 권신의 컨셉이었다.
*
동궁, 예지는 의경(이장)이 남겨놓은 일기장을 펴본다. 과거시험에 관해서 내용이 있나 살펴본다. 한참 찾아보니 있어서 읽어본다. 평범하고 그냥 자리에 앉아서 확인하고 관리들이 추천하는 거 중에 제일 좋은 거를 뽑으면 되는 모양이었다. 그중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충성에 대한 글이었다.
맹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최영의 사위로써 원한을 가졌음에도
태조대왕께 입신양명해 백성을 보살피고
무고로 인해 태종대왕께 백 대의 장을 맞고도
충성으로 모시고 세종대왕 때 어머니의 보살핌을 다하지 못함을
백성을 보살피라는 어명으로 마침 정승의 자리까지 올라
나라의 중임을 맡았던 충성함으로
나라의 일을 크게 해낸
인재중에 인재요.
충인 중에 충인이다.’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백성에 대한 충성이 있기에 가족의 원한도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내몬 자의 원한도, 모두 이겨냈다는 이야기였다. 백성에게 충성하는 것, 나는 이 자를 추천했지만 아바마마는 썩 반가워하지 않으셨다는 내용이었다. 아바마마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왕에 대한 충성뿐이었다. 군사부일체 중, ‘군’만을 원하셨다는 내용이었다.
*
강연장, 대소신료들이 모여 과거시험장을 바꾸면 어떨지 토론 중이었다. 관료 하나가 나서서 요즘 세자가 지쳐 보이니 동생이신 해양대군에게 일을 맡기면 어떨까에 대한 의견을 내었더니 모두가 옳다고 말하며 따랐다. 떠들썩한 분위기를 세조가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시험장은 세자다.”
이후 그 많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
*
예지는 예조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체크해야하는 부분을 일기장을 통해서 체크한 후 다시 예조로 와서 확인하고 있었다. 이 몸으로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맡은 일이라 다소 떨리는 부분이었다. 이대 예조로 채윤이 찾아왔다. 오- 하면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의경이었다. 채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멋있다고 해야할지, 예쁘다고 해야할지’
예지의 마음이 쿵쿵, 뛰었다. 선배를 닮은 권신을 볼 때와 비슷한 마음으로 심장이 하늘부터 땅끝까지 요동치었다. 덜컹거림을 느끼고, 진정하고자 하였으나 진정되지 않아서 채윤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는 예지였다. 채윤은 그런 예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다. 채윤이 세자에게 인사를 하고 확인 받을 문서를 내밀었다.
“함께하게 될 예문관 채윤이라고 합니다.”
채윤이 내미는 문서를, 샤르르 받아드는 예지였다. 문서를 받았을 뿐인데 러브레터를 받는 느낌이었다. 많은 남자에게서 받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설레는 아니지만, 채윤에게 받는 거라면 충분히 설레고도 밤잠을 설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게 저 남자의 마음이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마음을 내가 받아 쓰는 거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예지였다.
“이건 내일 시험 전날 보실 항복입니다.”
“그래, 채윤이구나”
헤벌쭉하면서 끄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넋이 반쯤은 나가 있는 세자의 모습을 보고, 세자가 요새 아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나 생각하는 채윤이었다. 채윤의 입장에서는 뭔가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예. 저하.”
*
깊은 밤, 정은의 집, 정은은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글공부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쉰다. 붓을 잠시 내려놓고 방안에 붙어 있는 각종 공부의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문밖에 보이는 달을 쳐다본다. 주먹을 꽉 쥐어 본다.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을 한 두 눈이 달 보다 반짝거렸다.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기고 채윤이 선물한 붓을 소중히 챙기고, 불을 끄고 집을 나설 준비를 마치는 정은이었다.
*
해가 하늘 높이 떴다. 동쪽으로부터 뜬 태양은 이제 어느덧 중천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꿈을 안고 속속히 모여들고 있었다. 과거 시험장이었다. 분주하게 시험장으로 입장하는 사람들, 서로 좋은 자리를 뀌려고 다툼이 일기도 하면서 소란스러웠다. 그중 제일 소란이 큰 건 시험장의 밖, 입구였다. 꽤 시끄러운 소리였다. 소란이 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미쳤어!! 죽으려고! 환장했나!!!”
들썩 밀쳐지는 한 왜소한 여인, 정은이었다. 이미 몇 번은 밀쳐진 모양이었다. 바닥을 몇 번이나 굴은 모양이었다. 봇짐은 이미 터져서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쯧쯧 혀를 차며 지나가는 남성들, 도와주려는 이 한 명도 없다. ‘미친년이 아직도 안 갔네’ 하는 소리와, ‘부정 타게 저게 뭐야’ 하는 욕설들은 있었다.
“죽을라면 혼자 죽지! 출세하고 싶으면 기생집에나 가!! 이년아!”
정은이 과거시험장으로 들어서는 것을 막아서는 포졸의 모습이었다. 정은은 여자의 몸으로 감히, 과거 시험장으로 들어가 과거시험을 치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