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인지 부족으로 인한 휴직의 고통
휴직하기 한 달 전에 그 해 발생하는 모든 연차를 소진했다.
2024년 4월부터 휴직에 들어가는 것이었으나, 실제적으로 3월부터 휴직을 시작한 셈이다.
초기 3달간의 생활시간표는 대략 아래와 같았다.
6:00 기상
6:00 ~ 6:30 이부자리 정리, 명상, 감사일기 쓰기
6:30~7:00 아침식사
7:00~9:00 수영
9:00 ~ 12:00 도서관 출근, 독서, 물건검색, 임장계획 세우기
12:00~13:00 점심
13:00 ~18:00 임장, 독서, 투자공부
18:00~19:00 저녁
19:00 ~ 22:00 임장 정리, 투자공부
뭐든지 100일간 꾸준히 하면 생활의 루틴이 잡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만들어진 루틴과 단순한 열정이 과다할 때 했던 결심들이라
그 열정에 서서히 번아웃이 오기 시작했다.
자기계발하다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딱 맞는 듯했다.
큰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실행하기 위한 작은 계획들을 마련하여 그것들을
이루는 것에 성취감을 느꼈어야 하는데,
큰 목표가 주는 압박감에 허덕이다 제풀에 지치지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이,
부동산 투자를 위한 법인의 대표이사를 아내 명의로 했었는데,
실업급여를 보며 버텨온 아내가 사업자 등록이 되어 있어서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열정에 열심히만 했던 나의 계획에 대해 자괴감이 느꼈던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코이의 법칙에 나오는 코이잉어인 줄 알았다.
코이의 법칙
코이잉어 물고기를 어항에 넣으면 5~8cm밖에 자라지 않고
연못으로 가져가면 12~25cm까지 자라지만
강에 넣으면 90~120cm까지 자랄 수 있다.
일본 어류인 코이가 자라는 물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듯 사람 또는 주변 환관 의지에 따라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과 꿈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법칙.
회사라는 작은 어항에 갇혀있기 때문에 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휴직을 하고 더 큰 목표를 향해 회사밖 세상으로 나오면 코이잉어처럼 스스로 자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급함 탓이었을지, 준비부족 탓이었을지, 나의 능력의 문제였을지,
스스로 자랄 줄 알았던 크기가, 크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휴직 전 스스로 머릿속에 그렸던 1년 후의 나의 이미지는 원하는 목표인 현금흐름을 만들고
복직하지 않고 당당히 퇴사하는 모습이었다.
퇴직원을 들고 제출한 후 팀원들에게 하이파이브를 받으며 회사 문을 나사는 그런 모습 말이다.
하지만 실제 나의 모습은, 남들 따라가기에도 벅차서 숨만 헐떡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무급휴직이었던 탓에 가계 소득이 '0'이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빨리 무언가 이루어야 한다는 조급함만 커져갔다.
이 당시 경매수업을 주로 들었었는데,
하물며 남들에게 하지 말라고 했던 행동들을 하기도 했다.
수업 추천 물건을 경매로 낙찰받았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투자하지 않았을 그런 물건이었다.
마음이 조급했던 탓에 무언가 하나라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소신대로 낙찰가를 적지 못했다.
강사가 낙찰을 위해 제시한 금액으로 입찰에 참여했다.
같은 날 비슷한 물건에 입찰할 사람과 통화하면서
그 강사가 2년 후에도 우리를 케어할 것도 아닌데, 소신껏 쓰세요라고 말했었다.
그 사람은 소신껏 써서 떨어지고, 나는 소신껏 쓰지 않아서 낙찰받아버렸다.
낙찰의 기쁨은 단 하루뿐이었다.
왜 사람은 일을 저지르기 전에 냉정하지 않고, 일이 발생한 후에 냉정해지는 건지..
투자의 책임은 오롯이 본인에게 있다는 경고 문구는 투자 전에는 왜 귀에 들어오지 않은 건지..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조급함은 점점 커졌고, 자존감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처음에 지지를 하던 가족의 눈빛도 한심하다는 투로 변해가는 것만 같았다.
1년 후 복직하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해 6개월 만에 복직하려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내가 나를 너무 몰랐고, 준비가 너무 부족했음을 느낀다.
그냥 단지 나의 열정에 대한 과신만 있었을 뿐이었다.
강원국 작가님이 아래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강의하고 책을 쓰고 방송하는 일을 10년쯤 하니,
그다지 힘들지 않다.
이유는 내 한계를 명확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그래서 편하다.
내가 나의 한계를 알 때 즉, 능력 안에서 욕망할 때 편해진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