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열대야가 계속된다.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쉽게 잠들지 못한다.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 왼쪽으로 열 걸음쯤 가면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작은 숲이 있다. 숲이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나에게는 숲 역할을 충분히 해주는 고마운 장소이다. 그곳에 발 디디는 순간 역동하는 여름의 풍경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느낌이다. '쉼터'라는 팻말이 걸려있는 나무밑 벤치에 앉아 여름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인다. 밤새도록 짝을 찾지 못한 매미의 맹렬한 울움소리가 처절하다. 또 각기 다른 음색을 가진 풀벌레 들은 짝을 찾지 못한 매미들을 조용히 위로하는 듯 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고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새벽의 신비로움을 느끼며 내 안에 나를 만난다. 나는 모든 것에 순응하며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는 자연을 얼마나 닮아 가고 있나 성찰한다.
여름 속에 앉아 있으니 문득 첫아들 낳은 해의 여름이 생각난다. 3월 28일이 생일이니 100일쯤 되었을 때가 여름의 시작이었다. 우리 집에 에어컨이 없던 시절, 더위에 칭얼대는 아기를 안고 새벽에 현관문을 나서면 시원한 새벽공기가 우리 모자를 반겼었다. 새벽의 시원한 공기 속에서 첫여름을 경험하는 아기와의 행복한 눈 맞춤, 보드라운 아기살과의 스킨십의 촉감이 선명하다. 그때도 분명 오늘 같은 여름의 소리가 있었을 텐데 들은 기억이 없다. 온통 사랑스런 아기에게 집중했기 때문이리라.
또 그해 여름 잊히지 않은 일이 있다. 시골에 사시던 시어머니께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에 오신 일이다. 첫 손자 백일 떡을 손수 해주기 위해서다. 기차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 가까이에 있는 선반에 쌀가루를 헤쳐놓으며 행여 상할까 노심초사하셨다던 그 여름이 오늘 무척 그립다. 분명 그때도 서울에 떡집이 있었을 텐데. 그런 고생도 손자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하셨던 어머니, 45년이 흐른 지금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고마움이 절절히 가슴에 파고든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성공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어머니처럼 무제한으로 사랑할 권리를 갖는 일, 그게 바로 성공이고 영광이라 믿는다.
이 여름, 장엄한 새벽을 맞이할 수 있는 이 작은 숲을 나는 감히 베토벤이 전원교향곡의 영감을 받은 비엔나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빈 숲에 견준다. 나에게 많이 사색하고, 감사하고, 무제한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자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하느님께 부탁했단다. '오늘은 보일러 온도를 너무 높이지 말아 달라고'
이런 유머러스한 친구가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