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인장 Nov 14. 2020

때타월처럼 따끔하게, 목욕물처럼 따뜻하게

네이버 웹툰 <목욕의 신>이 청년 독자들에게 건네는 충고와 위로

   살기 힘든 세상이다. 어떤 세상이 그리 살기가 쉽겠냐마는 부자 부모를 두지 않은 이상 현시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이 고달프다는 것은 몇몇 이들의 엄살이 아닌 사회적 현상으로 굳어진 진실이 되어 버린 듯하다. 어릴 때부터 경쟁에 내몰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버티는 삶에 지쳐버린 청춘들은 분명 시대와 구조의 피해자이지만, 물렁한 것들은 살아남지 못하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냉소적으로 변한 이들은 간혹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더 이상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애초에 노력을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에 동력을 잃고 무기력해진 이들은 질투심에 때때로 다른 이들의 열정을 쉽게 깎아내린다. 누군가 힘겹게 쌓아 올린 성과를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비웃고, 당장 사회에서 인정받기 힘든 꿈을 가진 이들은 조롱하는 행위는 인터넷과 현실 세상 모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들이 그런 추한 짓을 하는 이들보다 훨씬 많겠지만, 불행과 열등감은 쉽게 타인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네이버 웹툰 <목욕의 신>, 하일권


   하일권 작가의 웹툰 <목욕의 신>의 주인공 ‘허세’ 역시 화려한 외면에 집착할 뿐 내면에 품은 열정이 없어 타인의 꿈 또한 쉽게 무시하는, 이름 그대로 허세만 가득한 인물이다. 허세가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평생 남의 때만 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인생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여 그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지만, 학자금 대출에 쪼들리고 일할 곳이 마땅치 않아 절망하는 그의 모습은 이 시대의 청년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허세에게, 그리고 청년들에게 <목욕의 신>은 ‘금자탕’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따끔한 충고와 따뜻한 위로를 동시에 전한다.

   

   금자탕 회장의 반강제적 제안으로 얼떨결에 때밀이가 된 허세는 자신이 평생동안 무시하고 미워했던 때를 미는 일에 열정을 쏟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을 비웃는다. 그러나 금자탕의 목욕관리사들 역시 그들의 소중한 인생을 모욕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지만은 않는다. 허세의 사수 ‘강해’는 첫 대면에서부터 허세에게 남이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을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어떤 일도 소중히 여길 수 없다며 일갈하고, 개그 캐릭터처럼 보였던 ‘순무’ 또한 ‘겨우 목욕탕 따위’라고 생각하고 나가 버리면 다른 곳에서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냐며 뼈 있는 말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허세를 움직이는 건 세속적인 성공이었고, 그는 고객의 만족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수 강해가 아닌 야망 있는 목욕관리사 ‘김성공’을 롤모델로 삼고 따른다. 이후 금자탕 내에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고 콧대가 높아진 허세는 실수로 고객에게 상처를 내고 강해에게 혼이 나다 또다시 사회에선 직업으로 쳐주지도 않는다며 때밀이를 비하한다. 이에 크게 화가 난 강해는 너야말로 그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해 도망쳐 온 것 아니냐며,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주제에 역겨운 허세만 가득 찼다고 호통을 친다.


   강해를 비롯한 다른 목욕관리사들의 일갈은 허세의 도발에 반발하여 나온 것이기는 하나, 그들의 말은 분명 어떤 것에도 애정을 가지거나 노력하지 않는 자신의 비루한 삶을 타인의 열정을 조롱하는 것으로 위로하는 이들에게는 날카로운 일침이 되었을 것이다. 입에 쓴 약처럼, 듣기에는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말들이 있다. 강해를 비롯한 목욕관리사들의 꾸짖음 역시 그러하고, 그건 그들의 때타월만큼이나 따갑다. 그러나 그 따가움이 지나간 후에는 시원함과 개운함이 오듯이, 뒤틀린 부분을 지적당하고 직시하는 일은 잠시는 아플지라도 결국엔 자기발전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다만 막상 이러한 꾸짖음을 듣는 당사자인 허세는 전혀 기가 죽지도, 상처를 받지도 않는데, 이 때문에 작품이 전하는 유의미한 충고가 아버지가 때밀이었다는 특별한 가정적 환경과 극심한 나르시시즘을 가진 허세 캐릭터의 특수성에 여과되어 전달의 효과성을 잃은 것 같아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규모가 크긴 하지만 여전히 본질은 목욕탕인 금자탕이 대기업 부럽지 않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것도, 그 곳의 사람들은 때밀이도 모자라 목욕투 등 그들만 아는 이상한 문화에 진지한 것도 극 초반의 허세와 독자의 눈에는 모두 이상하고 낯설게만 비춰진다. 그러나 사실 금자탕이야말로 많은 이들이, 특히 청년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허세의 말처럼 밖에서는 직업으로 쳐 주지도 않는 때를 미는 일이 금자탕에서는 그 어느 것보다 신성한 것이며, 모두가 때 한 톨 한 톨에 열과 성을 다한다. 금자탕은 그러한 그들의 노력과 열정이 충분히 존중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이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인정을 받는 세상을 의미한다. 또한 VIP 손님을 대상으로 막내 시험을 치르는 대신 혼자 온 할머니를 챙긴 ‘유라’를 합격시킨 회장의 결단을 통해 금자탕은 사리에 밝게 행동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진심을 담아 내면의 가치를 실현하는 이들의 선택 역시 존중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금자탕의 인물들은 남들이 보기엔 사소할 수도 있는 자신의 일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부끄러워하지 않고 인정과 감사, 사과를 곧바로 표하며 그 무엇보다도 정당함을 중요시한다. 출세에 대한 야망으로 고위계층 손님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 김성공은 손님 앞에서 자신이 범할 뻔할 실수를 바로잡은 허세의 실력을 인정하며 감사를 표했고, 허세를 질투하고 모함했던 자신의 부사수 ‘석훈’에게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니 더러운 짓 말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라고 일침을 한다. 욕심 때문에 악행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그 역시 출세가 아닌 실력과 공정성을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다. 김성공의 꾸짖음을 들은 석훈 또한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허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누구보다 허세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던 강해 역시 허세에게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금자탕의 정의는 쉽게 어그러지지 않으며, 그것을 침해한 사람은 빠르게 사죄하고, 사죄한 자는 용서를 받는다. 이러한 선순환의 구조는 분명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꼼수와 편법, 심지어는 범법마저 서슴지 않으면서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철면피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화면 너머로 들여다보는 금자탕은 비현실적인만큼 이상적으로 느껴진다.


   첫 화에서 허세에게 ‘신의 손’을 가졌다고 호들갑을 떨며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를 스카우트하고 줄곧 아낌없는 격려를 보낸 금자탕의 회장은, 이야기의 막바지에서 사실 ‘신의 손’ 같은 건 없으며 그저 무언가에 쫓기며 방황하고 있던 젊은이에게 가능성의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는 허세가 아버지의 능력을 물려받거나 타고난 재능을 가졌기 때문에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며, 그저 사회의 시선과 요구에 쫓겨 갈팡질팡하다 타협해버리고 마는 이들도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든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진 것 없던 사회초년생인 허세에게 그러한 기회를 준 이가 큰 사회적 성공을 이룬 장년의 회장이라는 점에서, 기득권층이 이 사회의 청년들에게 해야 하는 일은 끊임없이 그들을 평가하고 재단하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재로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분야에서 열정을 가지고 노력할 수 있는 기회와 그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스스로에게도, 또 사회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이처럼 금자탕은 정의가 건재하며,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꿈과 진심의 가치를 존중하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능력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종의 유토피아이다. 아버지의 성실하고도 진심을 담은 때밀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인생을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것으로 치부했던 허세는 아무리 사소한 일, 심지어 때 한 톨마저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이 공간에서 아버지는 그만의 방식대로 꿈을 꾸고 아들을 사랑한 반면에 자신은 꿈도 열정도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실속 없는 인간이었고, 삶은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닌 내면의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단계 성장한 허세는 마지막 화에서 운 좋게 취직한 디자인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데, 이 장면의 구도와 연출은 첫 화에서 사채업자에게 쫓기던 장면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의 뜀박질은 도피에서 도약으로 그 의미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몇몇 독자들은 금자탕이라는 공간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현실에선 어림도 없다고 말하고, 어쩌면 이는 작품의 한계로 보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금자탕은 고층 빌딩이 빽빽한 도심에서 그 어떤 건물과 비교도 안될 만큼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며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금자탑 형태의 외관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내면의 열망을 소중히 여기며 정진하다 보면 자신만의 금자탑을 쌓아 올릴 수 있을 것이란 메시지는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36도씨의 목욕물만큼이나 따스한 위로가 된다. 따끔하지만 시원하다고 늘 때만 밀 수도, 몸이 녹아내릴 만큼 안락하다고 욕조에만 있을 수도 없지만, 가끔은 이런 작품을 통해 때도 밀고 몸도 담가야 이 혹독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지 않겠는가.


          



.

.

.

2020 SICAF 웹툰 평론 공모전에 냈던 자유 평론

작가의 이전글 질문하는 작가, 고민하는 독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