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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상혁 Feb 26. 2022

빨강머리 앤, 그리고 가족.

3. 처음으로 다시.

「빨강머리 앤」을 다시 본 건 유튜브 덕분이었다.「빨강머리 앤」만화영화 전편이 모두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 손쉽게 볼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TV에서 방영했을 때는 띄엄띄엄 보기도 했고 너무 어릴 때라 내용이 던지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주근깨가 많고 빼빼 마른 말괄량이 앤을 명랑한 목소리로 부르는 '주제곡' 정도만 기억 속에 오래 남아 무의식적으로 가끔 흥얼거릴 때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만큼 내게 인상적인 만화영화였다는 이야기도 된다.     


 말이 많아 수다스럽고 크고 작은 사고를 쳐서 골치 덩어리인 소녀의 이야기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앤의 생기 넘치고 상상력이 풍부한 모습은 나에게 늘 어떤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빨강머리 앤」이 원래 만화영화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주인공 '앤 셜리'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소설 분량의 중후한 문학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나는 소설로는 읽어본 적이 없었고 읽을 엄두도 안 났다.  

    

 캐나다를 이야기할 때 원작자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와 함께 이 작품을 빼놓을 수 없으며 1908년도 출판된 이후 5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어 무려 1억 부가 팔리는 세계적인 기록을 갖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빨강머리 앤」은 2022년인 지금까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빨강머리 앤」이 일본에서 만화영화〈세계명작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제작되어 방영된 것은 1979년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 방영된 것은 1985년이었다. 1985년은 내가 여섯 살 때였기 때문에 나는 아마 조금 더 자란 후에 TV에서 재방영된 것을 보았을 것이다. 정확히 몇 살 때라는 기억은 없지만 초등학교 때 본 이후로「빨강머리 앤」을 다시 찾아본 적이 없다가 최근에 정말 우연히 유튜브에서「빨강머리 앤」을 필연처럼 다시 만났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이라는 주제곡이 흘러나올 때는 어려서 뛰어놀던 우리 동네의 넓고 좁은 골목이 생각났고, 동네 뒷산에 피어있던 아카시아 꽃을 따기 위해 옆집 친구들과 나무를 타다 어른들께 혼이 난 기억이 몽글몽글 되살아났다. 그건 무척 반갑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이번에 50부작인 만화영화〈빨강머리 앤〉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보면서 40년 전에 만들어진 이 만화영화가 내게 이와 같이 폭풍우 같은 감동을 가져다줄지는 몰랐다. 앤이 마릴린과 매튜가 살고 있는 초록색 지붕으로 오고 나서의 좌충우돌 일상과 갖가지 사연으로 얽히고설킨 뒤에 모교 교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작품의 배경이 되는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섬’에서 앤의 성장과정이 드넓은 들판처럼 펼쳐지는 순간과 마주하면서, 나는 앤을 따라 웃고 화를 내고 침울해졌다가 기뻐지고, 깊이 고민을 하다 행복해했으며 슬픔과 마주했을 때는 앤의 눈물을 따라 나도 눈물지었다.    

  

 내가〈빨강머리 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 만화영화에서 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의 주제 중『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앤을 훌륭하게 키운 건 앤의 친부모가 아니었다. 앤과는 어떤 혈연관계도 아닌 '마릴린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였다. 앤과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었으나, 이들은 함께 살면서 그 어떤 가족보다 따뜻한 가정을 이루었다. 놀라운 일은 마릴린과 매튜는 부부가 아닌 남매 사이였다는 것이다. 둘 다 결혼을 해 본 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고 키워본 적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그런 마릴린과 매튜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릴린은 어머니의 역할을 매튜는 아버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어디다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숙녀로 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무려 1세기 전인 1900년 초창기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도 전에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을 바꿔버린 것이다. 한 가정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자식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당시에는 여성 작가가 매우 드문 시대였고, 부모가 없는 아이를 더구나 혈연관계가 아닌 아이를 데려다 훌륭하게 키워냈다는 이야기가 보편적이지 않을 때였다. 2022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입양’은 선뜻 나서서 하기 어려우며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데도 120년 전에 살았던 작가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앤은 마릴린과 매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고 주변의 자연환경과 친구가 되어 더 깊고 풍부한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한 아이에게 있어 ‘환경’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며 아이의 인생 전체를 바꿔 놓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나는 깊이 공감했다. 앤이 지금의 교육대학 격인 퀸 엘리자베스 학교에 수석 합격했을 때, 평소 묵묵히 앤을 뒷바라지하며 조용히 앤을 응원했던 매튜는 앤의 두 손을 마주 잡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남자아이 열 명과도 너를 바꾸지 못한다고, 나는 네가 1등을 할 걸 알았다고,
 너는 내 딸이라고.     


 매튜 아저씨가 심장발작으로 초록색 지붕 집 거실 바닥에 쓰러졌을 때, 그리고 매튜 아저씨가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앤과 마릴라 곁을 떠났을 때, 나는 그 모든 과정의 결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오르는 슬픔에 가슴이 메였다. 앤이 가장 의지하고 존경하며 사랑했던 앤의 가족, 친아버지는 아니었으나 친아버지 이상의 사랑을 앤에게 쏟아부었기 때문에 앤은 누구보다 명랑하고 밝게 그리고 야무지고 똑똑하게 자랐다. 앤이 퀸 엘리자베스 학교 졸업하는 모습을 메튜 아저씨는 끝내 보지 못했지만 매튜는 분명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앤을 생각했을 것이며, 하늘에서는 앤의 수호천사가 되어 있을 것이라 나는 상상했다. 앤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 된 것은, 내가「빨강머리 앤」이라는 작품에 완전히 빠져 몰입되었다는 것이었고, 앤의 입장을 사무치게 공감했다는 반증이었다.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반드시 혈연관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그 이상의 끈끈한 가족애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무려 소설로는 120년, 영상으로는 40년도 전에 만들어진 작품에서 다루고 있다. 부모가 불행한 사고를 겪거나 부모에게 버려져 홀로 남은 아이들을 우리는 '고아'라고 부르며 알게 모르게 차별했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결손가정'이라는 말로 '결손'이라는 말도 아직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주었다. 나 역시 '결손가정'이라는 말을 들은 경험이 있고 그건 내게 깊이 파여 뚜렷한 흔적을 남긴 상처로 남았으며 아직까지 아플 때가 있다. 홀로 남은 아이가 부모의 불행한 사고를 바란 것도 아니고, 부모에게 버려지기는 더더욱 원한 것이 아닐 텐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홀로 남은 아이'에게 불행의 씨앗이라며 아이가 밝고 건강하게 자라지 못할 것이라 못 박기도 했다.     

     

 그러나,〈빨강머리 앤〉은 이 모든 것을 반박하고 있다. 앤은 못생기고 빨강머리에 주근깨 투성이며 게다가 빼빼 마르기까지 해서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마릴린과 매튜가 앤을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한 덕분에 앤은 그 어떤 다른 아이들보다 풍부하고 생동감 넘치는 상상력으로 슬픔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끝내는 매튜 아저씨가 없는 초록색 지붕의 가장이 되어 홀로 남은 마릴라 곁에서 꿋꿋하게 집을 지켜냈다. 아이에게 아낌없이 주는 사랑의 중요성이 이와 같이 중요하다.

 마릴린의 엄격하지만 옳고 그름을 논리적으로 가르치며 앤의 성장을 돕는 모성애에 바탕을 둔 사랑,  말과 행동으로는 잘 표현하지 못하지만 앤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앤의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매튜의 해바라기 사랑이 없었다면, 주인공 '앤 셜리'가 제아무리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긍정적인 생각이 넘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재앙이 되어 새까맣게 타버린 재와 같이 변하는 건 한 순간일 수도 있었다.    


 2022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가족』은 이제 더 이상 핏줄로만 이어져 이루어지는 집단이 아니다. 한 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잠을 자고, 일상의 크고 작은 일을 공유하며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구성원들을『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정 이외에도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 '재혼가정', '형제자매들로만 이루어진 가정', '친인척과 조카로 이루어진 가정', '입양으로 이루어진 가정', '아이가 없이 부부로만 이루어진 가정', '부부 관계는 아니나 마음이 맞아 같이 사는 친구로 이루어진 가정', '어떤 특별하고 우연한 계기로 인해 타인끼리 모여 사는 가정'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족의 구성이 존재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 했던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분명히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에게 유일무이하고 소중한 여러 가족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당신과 내가 이 거친 세상을 함께 살아가기 위한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존중이라 믿는다.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감한다면, 모두가 숨쉬기 편한 세상이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빨강머리 앤〉의 매튜 아저씨는 구름 위 하늘 위에서도 빨강머리 앤을 한결같이 응원할 것이다. 앤은 매튜가 가슴으로 기른 유일한 ‘딸’이기 때문이다.


 매튜 아저씨가 끄는 마차를 탄 앤이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환하게 웃으며 지나갔던 봄이, 우리 모두에게 성큼 다가오고 있다. ■               

 

 

*위에서 언급한 만화영화「빨강머리 앤」은『세계명작극장 '빨강머리 앤'(赤毛のアン)』(1979년, 일본 후지 TV)의 한국어 더빙본을 참고했다.


                                                                                                                      사진출처: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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