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상혁 Feb 16. 2022

무지개가 떴다.

2. 처음으로 다시.

 무지개를 오랜만에 보았다. 비가 오더니 금세 눈으로 바뀌고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잠잠해졌다. 먹구름이 물러가고 햇빛이 비치더니 사방이 연분홍색으로 짙어져 갔다. 물결치는 바다는 잔잔했다. 종일 머리가 무거웠다. 생각해보면 오늘뿐만 아니라 2월이 되고 나서 계속 생각이 모아지지 않아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깊이 심호흡을 했다. 호흡 간에 들이차는 바다 내음에 잠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저 멀리 바다를 향해 솟아있는 언덕에서부터 무지개가 떠 있는 것이 담뿍 눈에 들어왔다.     


 무지개가 떴네, 하며 나는 혼잣말을 했다.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데도 혼자 말하고 그러다 계면쩍어져 피식 웃었다.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롭다기보다는 한적하다고 생각하지만 때로 이렇게 쓸쓸할 때가 있다. 모처럼 본 무지개는 흐릿해서 일곱 가지 색깔을 다 알아볼 수 없었다. 무지개가 왜 생기는지 배웠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뜻밖에 찾아온 오랜 친구를 맞이한 듯 평온해지는 마음에 좀 전과는 다른 미소를 지었다. 


 매일같이 보는 하늘에 무지개 하나 떴다고 온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니, 생각도 하지 못한 풍경과 마주쳐서 나는 잠시 복받쳤다. 연분홍 하늘은 불그스레한 기운으로 번졌고 내 마음도 그리움으로 붉어져갔다.   

  

 써야 하는 소설이 도돌이표처럼 한 곳에서 계속 맴돌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나는 외로웠다. 하루를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보내버리면 심한 자책감에 피부부터 건조해지면서 몸 안의 수분이 바짝 말라가는 느낌이 든다. 분리수거함에 내가 마시고 버린 생수 페트병이 쌓여가며 부피를 늘려갔지만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 들어본 분리수거함은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대형 비닐봉지에 넣은 생수 페트병을 가슴 가득 안고 쓰레기장으로 가면서 나도 페트병처럼 부피만 크고 무게는 나가지 않는 빈껍데기 같아 쓴웃음 지었다.    

  

 사람들이 버리는 온갖 쓰레기들이 모이는 쓰레기장 너머로도 눈부시게 펼쳐진 넓고 깊은 바다가 출렁거렸다. 내 마음 어떤 줄기도 출렁거리는 거 같아 나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옅은 연무가 낀 바다는 잔잔했지만 오랜 상처를 집어삼키고 생을 견디는 늙은 어부처럼 낡고 무거워 보였다.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나는 잠시 양팔을 살짝 벌려 깊이 호흡했다. 물기 어린 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왔고 비릿한 소금기가 코 점막에 닿아 가뜩이나 건조한 몸이 더욱 오그라드는 거 같았다. 드넓은 바다를 보고 있어도 나는 자꾸 내 안으로 좁아지는 거 같아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손을 털며 베란다로 향했다. 무지개가 아직 남아있어 다행이다 생각하고 베란다 창문을 열고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고 비린 바닷바람이 얼굴에 부딪혔다. 집이라는 곳이 그래도 지금 나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것이기도 해서인지 바깥에서 맞은 바닷바람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건조해진 피부가 바스러질 거 같았지만 시원한 바람에 머리가 맑아지는 거 같아 그대로 바람을 맞았다. 해가 기울면서 기온이 떨어져 한기가 들어 나는 양팔로 몸을 감쌌다. 양 손바닥으로 나 스스로를 토닥였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혼잣말을 했다.     


 잠시 망설여도 괜찮다. 너무 스스로를 탓하지 말자.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삶이고, 나는 그 삶을 살아내야 하고 또 살아낼 것이니까.      


 드물지만 가끔은 무지개가 떠서 나를 미소 짓게 하는 것처럼, 아무 예고 없이 반가운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것처럼, 예상하지 못한 소소한 행운들이 불쑥불쑥 나를 찾아와 온몸에 온기가 번지는 것처럼,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와 휘몰아치는 열기에 나를 빠지게 하리라, 믿는다. ■




작가의 이전글 제주의 인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