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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상혁 Jun 29. 2022

청귤의 계절.

6. 처음으로 다시.

 귤은 겨울에 먹는 과일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여름에도 먹을 수 있는 귤이 있다. 바로 ‘청귤’이다. 일본에서는 '여름 귤-나쯔미캉(夏みかん)'이라고 해서 매년 이맘때쯤이면 마트 과일 판매대에서 판매하기도 한다. 파는 걸 본 적만 있지 실제로 사 먹은 적은 없다. 한국에서는 청귤이란 걸 들어는 봤어도 먹어본 적도 없었고,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낯선 과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푸르스름한 청귤은 철이 아닌 과일이라 덜 익어 굉장히 시고 떫을 거 같다는 편견도 있었다.


 서울에서는 여름에 청귤을 팔지도 않았고, 일본에서는 보통 자몽처럼 ‘귤 주스’나 ‘귤청’을 만들 때나 쓰라고 여름에 청귤을 판매하는 줄로만 알았다. 또한 일본에서 여름에 청귤을 판매한다고 해도 사 먹지 않은 것은 낯선 과일인 것에 더해 굉장히 비쌌기 때문이었다. 작은 감자 알만 한 청귤 5개 정도 들어있는 봉지가 7천 원이 넘었다. 일본에서 과일은 대체로 비쌌지만 한국에서 귤을 사 먹던 가격을 알기 때문에 7천 원을 주고 조막만 한, 게다가 덜 익은 거 같은 청귤을 사 먹을 마음이 조금도 일지 않았다.


 일본인 친구에게 일본인들은 여름이면 청귤을 자주 사 먹느냐고 물었지만, 일본인 친구도 겨울에 제철 귤을 먹으면 되지 굳이 신 맛이 강한 청귤을 사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구매한 적이 없다고 했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체로 청귤에 대한 생각은 나나 내 일본인 친구와 같지 않을까.     


 “제철 과일이 아니다, 굉장히 신 맛이 강하고 잘못하면 떫을 수도 있다, 왠지 귤껍질이 두꺼워 먹기 불편할 듯하다.” 등등


 그러나 제주에서 청귤을 만나고 나의 이와 같은 고정관념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앞으로 여름이 가까이 오며 바닷바람이 뜨거워지면 제주의 ‘청귤’이 어김없이 생각날 거라 확신한다.     


 나는 곧 제주를 떠난다. 1년 남짓 지낸 곳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손이 많이 가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더러는 중고마켓에 물건을 내놓아 팔고, 더러는 얼굴을 아는 몇 사람에게 물건을 나눠주고, 책 같은 것은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한다. 버리기도 그렇다고 남을 주기도 애매한 자잘한 물건들이 계속 나오다 보니 6월이 되면서 나는 신경이 좀 날카로워졌다. 더구나 2주 넘게 어지럼증이 계속되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제주의 해초 내음을 머금은 습한 공기가 반가울 때도 있었지만,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날들에는 비린내로 밖에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신산스러워질 때도 많다.


 제주의 습한 더위가 이어지는 날들에 짐을 정리하다 나는 결국 드러누웠다. 해무가 끼면 베란다 너머 보이는 섬을 집어삼키는 제주의 해무는, 지켜보고 있으면 가끔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먹먹한 무거움이 있다. 그런 무거운 날에는 몸도 푹 젖은 솜 같다. 그런 와중에 조금만 움직여도 어질어질해 꼭 배 멀미나 버스 멀미를 한 듯했고, 구토까지는 아니었지만 속이 메슥거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식욕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밥도 잘 먹었고 열이 있거나 하지 않아 몸살도 아니었다. 뭔가 싶어 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으니 몸살 같다고 해서 수액을 처방받아 맞기도 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더위를 먹은 것인지 약골인 나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병원을 다녀와도 호전이 없어 나는 재차 병원을 찾았고 이번에는 피검사를 했다. 다음날 검사 결과상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혹시 먹고 있는 약을 바꿨거나 요새 과로를 했느냐고 물었다. 먹고 있는 약을 바꾼 적은 없고, 과로를 할 정도로 일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했다. 큰 병원에 가야 하나 스멀스멀 불안이 제주 해무처럼 나를 축축하게 했다.  

   

 축축한 마음으로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제주 집 임대인의 어머님(80대 정도의 제주 토박이 할머니)께서 빌라 현관문 옆에 의자를 꺼내놓고 앉아 더위를 식히고 계셨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방안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와서 잠깐 바람을 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노인이시라 후텁지근한 공기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좋지 않을 거 같은 마음에 잠깐이지만 걱정이 됐다. 오며 가며 1층 현관문 주변에서 몇 번 마주쳐서 나는 임대인 어머님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어머님도 나를 기억하시는 눈치였다.

 어머님이 내게 뭐라고 말을 걸었다. 완벽한 제주 방언이었다. 당연히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여름이 되면 제주 마을 골목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중에 하나가, 동네 할머니들이 집 현관문 바로 옆에 신고 있는 신발을 벗어 깔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이다. 할머니 한 분이 그렇게 앉아 계시면 어디서 모여드는지 금세 대여섯 분의 할머니들이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여기 서귀포에서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기도 하다.


 여름이 되면 무덥기 때문에 나는 창문이라는 창문은 다 열어두고 글을 쓸 때가 있다. 전기세가 무서워 에어컨을 하루 종일 틀어놓을 수도 없고, 에어컨 바람이 어느 순간이 되면 한기로 엄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럴 때, 할머니들의 '말'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내가 앉아 있는 방에까지 빈틈없이 들어차게 된다. 무슨 말들을 아주 재미있게 하는 듯한데 역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글을 쓰다 말고, 나는 일어나서 열어놓은 창문에 고개를 비쭉 내밀고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뭘 좀 알아들어보려고 말이다. 하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알아듣긴 뭘 알아듣냐.’ 하면서 혼자 피식 웃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을 때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임대인 어머님이 내게 무슨 말을 걸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살짝 몸을 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데, 같이 타고 올라갈 줄 알고 나는 먼저 타고 출입문이 닫히지 않게 열림 버튼을 누르고 어머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대인 어머님께 얼른 타시라고 말을 건넸는데 어머님이 내게 무슨 말을 했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잠시 멀뚱히 쳐다봐야 했다. 어머님이 먼저 올라가라는 듯 손짓을 하는 것을 내가 눈치껏 알아채고 올라간 적도 있어 혹시 내가 어머님 말을 못 알아들어 실례를 범하는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해서 나는 어머님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그 후에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데, 임대인 동생분이 중간에 통역을 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빌라 현관문에서 임대인 어머님과 딱 마주치게 되었으니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마치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어머님이 출입하는 현관문 바로 앞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어머님께 형식적이나마 인사를 하고 들어서야 했다.     

 

 나에게 말을 건넸는데도 내가 못 알아듣고 머뭇거리자 임대인 어머님이 의자에서 일어나 내 왼쪽 팔을 잡고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어머님에게 이끌려 현관문을 지나고 엘리베이터를 지나, 1층에 창고로 쓰는 공간에 들어서게 되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시골의 창고였다. 언젠가 내가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소변이 급해서 4층 내가 살고 있는 집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1층 창고에 붙어있는 화장실을 살짝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마저도 내가 들어가면 안 되는 곳에 들어간 건 아닌지 소변을 보고 나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곳에 들어섰으니 나는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창고 안에서 임대인 어머님이 하신 말씀 중에 유일하게 알아들은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미깡"


 미깡이었다. 미깡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귤'이다. (제주에서는 귤을 ‘미깡’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머님이 ‘미깡, 미깡’ 하시면서 나를 이끌고 간 창고 한쪽 바닥에는 노란 박스 두 개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짙은 녹색의 귤이 가득가득 담겨있었다. 하나도 익지 않은 거 같은, 보기만 해도 신맛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이는 청귤을 보면서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란색의 귤만 보다가 노란색은 눈곱만큼도 안 보이는 짙은 녹색의 귤을 보게 되니 신기함을 떠나 경이로웠기 때문이었다. 레몬과 비슷한 껍질의 녹색인 ‘라임’ 같기는 했으나 타원형의 라임보다는 그저 흔히 보는 귤의 둥글둥글한 모양이기도 했고 크기도 ‘라임’ 보다는 훨씬 컸다.    

 임대인 어머님은 이 귤을 가져다 먹으라는 소리를 내게 한 것이었다. 오래 두면 썩어 못 먹게 되니 가져가서 먹으라는 소리라는 것을 나는 눈치코치로 대충 알아들었다. 청귤은 무슨 맛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레몬이나 라임처럼 신 맛만 나면 설탕에 재 놓고 차로 마시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용할 방법들이 머릿속에서 번득이자 나는 손에 집을 수 있을 만큼 청귤을 집어 들었다. 손에 다 집을 수 없어 옆에 메고 있던 가방에도 가득 -사실 그 후, 청귤을 맛보고 나서 홀딱 반해 밤늦은 시간 비닐봉지를 하나 가지고 가서 비닐봉지가 터질 정도로- 넣었다. 더 가져다 먹으라는 임대인 어머님의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씀드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머님께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웬일인지 어머님의 얼굴에는 더 가져다 먹지 않아 아쉬운 얼굴 표정이었다. 오래 두면 썩는데, 썩을 바에야 빨리 먹어치워야 하는데 그런 표정 말이다. 아무리 그냥 가져다 먹으라고는 하지만, 임대인 귤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막 가져다 먹을 수도 없었고, 그보다는 청귤이 레몬이나 라임처럼 신 맛만 날 터인데 많이 가져가서 뭐하나 싶기도 했다.      


 집에 와서 싱크대 위에 청귤을 올려놓았다. 그야말로 청색, 덜 익은 거 같은 청색 귤,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하나를 집어 들고 껍질을 깠다. 겨울에 먹는 귤보다 껍질이 두꺼웠다. 껍질이 두꺼우면 귤이 맛이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벌써부터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면 그렇지.’ 껍질을 까는 손놀림에 힘이 빠졌다. 그런데 껍질을 좀 더 까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귤 향기가, 달콤하고 새콤한 귤 향기가 온 방에 순식간에 퍼져갔기 때문이었다. 껍질을 살짝 벗겨냈을 뿐인데, 상큼하고 달달한 향이 주방의 공기부터 가볍게 하더니 습기로 눅눅한 주변 공기 입자를 걷어내 가는 듯했다. 산뜻한 기분이 된다는 말을 이럴 때 쓸 수 있겠구나 싶었다. 껍질을 다 까고 손에 쥔 귤 알맹이는 겨울에 먹는 귤보다는 뻣뻣한 느낌이었다. 아직 잘 여물지 않은 느낌, 그러나 생생하고 싱그러운 느낌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는 느낌.     


 청귤을 하나 입에 넣었다. 시큼한 맛이 강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시큼한 맛을 각오하고 청귤 하나를 입안에 넣은 순간, 탱글탱글한 귤 알갱이들이 터지면서 상큼함이 입안 전체로 번져갔다. 신 맛이 강할 거라는 내 생각은 청귤을 입안에 넣고 씹는 순간 말끔히 사라졌다. 내가 얼마나 큰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대번에 깨달았다. 새콤달콤한 맛이 바로 이 맛이구나, 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맛이었다. 달고 시원한 맛이 났다. 달고 시원하고 상큼하고 산뜻한 맛이 나면 안 되는데 왜 이런 맛이 나지, 하면서 나는 어느새 청귤 하나를 다 먹고 다음 청귤 껍질을 까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무엇보다 습한 더위에 지친 몸 안의 눅눅함을 한꺼번에 몰아내는 기분, 꿉꿉한 방안에 제습기를 강하게 틀어 보송보송해진 공기와 맞닥뜨리는 기분, 바로 그 느낌이 입안은 물론이요 몸 전체를 가볍게 해주는 기분에 행복했다. 나는 그날 앉지도 않고 싱크대 앞에 서서 청귤을 10개 정도 까먹었다. 그리고 앞으로 청귤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모처럼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 만나 금세 친구가 되는 것처럼 나는 청귤을 먹으며 설레는 마음을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1층 창고 노란 박스 안에 청귤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빌라에 세입자가 적은 편이기는 해도 이 맛있는 청귤을 왜 안 가지고 가나 싶었다. 임대인이 2월에 세입자들 먹으라고 내놓는 귤은 내놓기가 무섭게 사라져서 나는 바닥에 몇 개 남은 귤을 가져다 먹은 적도 있었는데, 그에 반해 청귤은 영 인기가 없었다. 제주 사람들은 청귤이 맛있다는 것을 잘 알아서 가져다 먹을 텐데, 이 빌라에 사는 세입자들도 나처럼 육지에서 왔나 보다고 나는 제멋대로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청귤을, 준비한 비닐봉지에 가득 담고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냉장고 과일 칸에 청귤을 넘치도록 넣어놓고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책상에 앉아 까먹었더니 금세 집안 전체에 청귤의 향이 넓고 진하게 퍼져갔다. 녹색으로 우거진 수풀 속에 들어가 깨끗하고 맑으면서 시원한 냇물을 만난 것 같은 기분에 나는 한동안 기뻤다.    

 

 이 맛있는 것을 혼자 먹을 수가 없어, 올봄에 나를 보러 제주까지 와 준 지인과 친구들 맛보라고 청귤을 보내고 싶어졌다. 귤 한 박스의 가격을 대충 알고 있어 꼭 보내고 싶은 사람들을 추려내고 명부를 작성한 뒤에 임대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청귤 맛있게 잘 먹었다고, 혹시 판매를 하시는 거면 몇 상자를 사고 싶다는 문자메시지였다. 내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임대인이 전화를 해왔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난 뒤 처음으로, 나는 임대인과 통화를 했다. 청귤을 사이에 두고.     

 

 임대인과 짧은 통화를 하고 나는 작성해둔 명부를 접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청귤은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내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으면 창고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면 청귤 박스가 더 있으니 원하는 대로 가져가 보내라고 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만, 귤은 귤 박스가 아니면 택배로 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우체국에 드나들면서 잘 알고 있었다. 우체국에 가면 우체국 한쪽 벽에 귤 박스가 아닌 일반 박스(또는 우체국 택배 상자)에 넣은 귤은 취급하지 않는다고 커다랗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일반 박스로 보내면 귤이 이송 중에 눌려 터지거나 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귤 상자가 보기는 일반 상자 같아 보여도 두껍고 단단한 게 다 쓸모가 있어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청귤이 여러 사람들에게 보낼 충분한 양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을 접고 대신 내가 후텁지근한 여름 나기로 청귤을 쟁여놓고 먹기로 결정했다. 더하여 임대인의 따뜻한 마음에 나는 혼자 미소 지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꽤나 값을 받아야 하는 청귤을 무상으로 제공해 주시다니, 제주의 인심을 다시 한번 느끼며 냉장고에 가득 담긴 청귤을 먹을 다양한 방법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상하기 전에 귤껍질을 벗겨 냉동을 해서 아이스 청귤을 만들어 먹어도 좋으리라.


 청귤은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지 판매는 하지 않는다. 임대인이 가족들끼리 이웃들끼리 나눠먹으려고 가지고 왔다고 했으나 나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당장 제주공항에 있는 카페에만 가도 '청귤 에이드', '청귤 스무디' 같은 음료를 팔고 있었고 가격도 통상 판매하는 음료보다 다소 비쌌기 때문이었다. 음료로는 값어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과일로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듯 한 청귤, 제주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맛볼 수 없는 청귤, 설혹 육지 사람들이 청귤을 봤다고 해도 나처럼 제철도 아니고 맛도 시큼할 거 같은 청귤을 굳이 돈을 내고 사 먹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해보면, 청귤이 상용화되지 못한 것은 '인식의 변화'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사람은 스무 살만 넘어도 개인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바꾸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맞지 않다고 억지로 고치려고 해 봤자 나만 힘이 빠지고 실망하기 마련이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면 할수록 실망이 커지는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르겠다. 사람을 겉만 보고서만 판단하면 크게 오판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여름에 만난 청귤이 새삼 잊고 있던 소중한 생각을 일깨워주었다.


 귤은 겨울에만 먹는다는 생각, 청귤은 덜 익어 시큼하고 어쩌면 떫을 수도 있다는 편견. 세상을 살아가며 이런 생각과 편견들에 나도 모르게 갇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새로운 것에 늘 도전하며 멈추지 않는 것이 내 일인데도 말이다. 고립된 생각과 편견 너머, 상상도 못 한 일들이 펼쳐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옹송거리며 주저한 건 아닌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제주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준비를 하며, 나는 해보지도 않고 겁을 낸 것은 아닌지, 마음이 움츠러들어 뭐든 소극적이 되고 짜증부터 낸 것은 아닌지, 여름은 더워야 여름인데 제주 짐을 정리하며 올여름은 유난스럽게 덥다고 인상을 찌푸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덜 익은 거 같고 맛도 시큼해서 입맛을 버려놓을지도 모른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나는 이토록 맛있는 청귤을 주스 또는 귤청으로나 만들어 먹을 뻔했다.      


  청귤 한 개를 입에 넣었을 때 온 세상이 달리 보였던 것처럼, 청귤 같은 공간에서 청귤 같은 사람들과 청귤 같은 삶을 살며 웃고 싶다.     


  아직 덜 익은 것 같지만 실은 제대로 잘 익어 여름에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청귤,     

 

  청귤의 계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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