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림 Mar 15. 2024

예술의 진보와 반동

"파카소 선생, 당신은 왜 그림을 그리 이상하게 그리시오? 이 사진을 좀 봐요 예쁜 내 아내인데 얼마나 아름다워요? "  호주머니 지갑에서 작은 사진을 꺼내 보이며 이런 질문을 던진 이는 피카소가 여행 중에 열차에서 만난 어느 시민이었다.     


 라파엘로나 르느와르 같은 화풍으로 우리 시각에 편안함과 행복감을 주는 그림은 더 이상 대접받을 수 없을까? 이제 미술은 뭔가 튀는 요소가 있던지 불편함을 주던지 색다른 자극을 갈망하는 흐름만 있는 것인가? 회화에서는 극단의 추상으로 의미에 숨은 의미를 보고 또 봐도 난해함으로 달려가고, 뒤샹의 변기와 만초니의 베설물, 카텔란의 바나나는 계속 등장할 것인가. 예술가들의 고민 또한 깊어질 것이고 진보와 반동, 전위와 전복 어딘가에서 정신세계는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엽기와 그로테스크로 갈지도 모르는 열차에서 내려 차분히 자신의 정물과 인물을 우리가 넉넉히 예상하는 형식으로 표현하며 지극히 상식적인 행로로 달려가는 화가도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전적인 예술론, 미적 '재현론'에 후한 점수를 주미학자도 있다.


뒤샹 이후에도 회화는 계속 현실을 재현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려야 하지 않을까? 과거의 예술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건 그것이 현실을 재현했기 때문이다. 왜 미래의 예술은 더 이상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걸까?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대답은 이렇다. 20세기 서구는 의미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더 이상 신도, 진보도, 이성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세계를 단순히 사실적으로 해석하기만 하는 예술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나는 정반대의 가설을 제안하고 싶다. 즉 우리는 세계를 재현하려는 용기를 잃어 벼렸고, 그렇기에 점차 모든 의미의 상실에 빠져들고 있다고. 풍경화가 사라지자 콘크리트가 세상을 뒤덮었고, 환경 재난이 이어졌다. 꽤 훌륭한 논리 아닌가.

     - <또 다른 현대미술>  뱅자맹 오리밴느 지음, 김정인 옮김 p. 68


천하의 피카소는 시민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사진을 뚫어지게 보며 이런 답을 내놓았다. "그래요? 당신 부인이 미인이라는 말인데, 내가 보기엔 엄청나게 작고 게다가 납작하네요." 우리가 아는 실체와 육안은 언제나 착시와 진실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AI가 던지는 화두는 예술계도 비켜갈 수 없을 것이다. 생각과 관점의 차이는 혁신과 반동 사이, 어딘가에서 예술가의 창작욕에 불을 지피기에 예술의 위기는 늘 있어도 이를 너끈히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론에 한 표를 주고 싶다.   


Dvořák: 7. Sinfonie ∙ hr-Sinfonieorchester ∙ Andrés Orozco-Estrada (youtube.com)

작가의 이전글 작가 되기의 어려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