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건넨 선물: 구스타브 바우만

New Mexico Museum of Art

by 원정미

산타페의 거리는 걸을수록 자꾸 발을 붙잡는다. 산타페는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도시로 갤러리와 미술관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을 나온 후였다. 마음 같아서는 거리 곳곳에 들어선 미술관과 갤러리들을 하나씩 다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옆에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다. 이미 오키프 미술관에서 충분히 시간을 썼다. 더 조르는 건 욕심이었다. 나머지는 다음에, 남편과 단둘이 오자고 속으로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눈에 들어온 작은 사인 하나.

“Community Day. Admission Free.”

지역 주민을 위한 날, 입장 무료. 나는 어떤 미술관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마치 뭔가에 홀리듯.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곳이 New Mexico Museum of Art였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발이 멈췄다.

벽을 가득 채운 작품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림인 줄 알았다. 수채화처럼 맑고 부드러운 색감, 파스텔톤의 노랑과 연두, 보라와 하늘색이 조용히 어우러진 화면.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았다. 그림이 아니었다. 목판화였다. 컬러 목판화.

Gustave Baumann. 구스타브 바우만.

뉴멕시코의 나무와 꽃, 풍경을 담은 그의 작품들 앞에 서자 이상하게 마음이 느슨해졌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남편도 잠시 잊었다. 나를 잡아 끄는 딸의 손길도 뿌리쳤다. 그냥 거기 서서 오래 보고 싶었다. 나뭇잎 한 장, 꽃잎 한 올까지 섬세하게 새겨낸 선들을 눈으로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이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 앞에 앉아 있었을지 절로 짐작이 갔다. 동화책 삽화 같기도 한 그의 그림 앞에서, 내 마음도 어느새 몽글몽글해져 있었다.


바우만은 독일 태생으로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온 후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후 다시 독일로 건너가 공예학교에서 목판과 목조각을 공부하며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완성했다. 그러던 그가 여행으로 산타페를 방문했다가 그만 이곳에 눌러앉아 버렸다.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빛의 색감, 사막과 하늘과 어도비 양식의 건물이 만들어내는 풍경에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산타페에서 50년을 살았다. 덕분에 뉴멕시코의 자연과 문화가 고스란히 그의 작품 안에 살아있다.


미술관 한쪽에는 그가 손수 만든 마리오네트 목각인형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작은 인형 하나하나에도 정교하게 다듬어진 손길이 남아있었다. 그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장인이었다. 이 많은 양을 작업하기 위해 그가 쏟아부은 시간을 상상하려 했지만,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작품에 감동받은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장인정신.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한 땀 한 땀 새겨낸 그 정성과 집중력. 그것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그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하트 모양 안에 손을 그려 넣은 인증 마크가 있다. “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마음을 거쳐야 한다(What the hand does, the heart must feel)“는 그의 신념을 담은 것이다. 그림 앞에 서면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몸으로 알게 된다.


요즘 현대미술은 장인정신보다 작가의 개념과 이념을 표현하는 데 무게를 둔다. 이미 만들어진 화장실 변기를 가져다 놓고 “나는 이것을 ‘샘’이라 부르겠다”라고 하면 작품이 되는 세상이다. 기존의 관념을 뒤트는 창의적 발상,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장인정신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못내 아쉽다. 예술에는 어느 정도의 작가의 정성과 시간이 남아있어야 한다고 믿는, 나는 아마 그런 꼰대인지도 모른다.


기프트샵에서 나는 한참을 서성였다. 그의 작품이 담긴 책과 앨범, 달력들을 하나씩 들었다 놓았다 했다. 다 사들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캠핑카 여행 중이었다. 짐은 늘릴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그의 그림이 담긴 작은 달력 하나를 골랐다. 계산을 마치고 미술관을 나서며 그것을 가슴에 꼭 품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우연한 발견이라고 했던가. 공짜라는 말에 이끌려 무작정 들어간 미술관에서, 나는 평생 기억할 작가를 만났다. 그런 날이었다.



https://www.nmart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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