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울타리
성묘를 가는 길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가을 풍경이 펼쳐진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내 마음을 적셔준다. 여름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알록달록한 단풍과 주렁주렁 매달려 익어가는 과일들이 보인다. 시아버지에게 사랑받았던 순간들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시아버지는 칠 남매를 감싸주는 울타리였다. 그분이 일구어놓은 200평 대지 위에 기와집 몇 채를 앉았다. 밭 둘레에는 사과나무와 감나무가 고즈넉이 자리를 잡았다. 그 모든 공간은 태어날 어린 손자들의 놀이터였다. 성장한 자식들이 결혼하자 며느리들이 모여들고, 손자들이 태어나면서 집안은 늘 북적였다. 시아버지가 준비해 둔 북어와 미역은 며느리산후용이 되었고, 텃밭에는 밥상을 풍성하게 해준 채소들이 자랐다.
기와집은 방이 열 개가 딸렸다. 하지만 대문 밖에 딱 하나뿐인 화장실은 매일 아침 진풍경을 만들어냈다. 허리춤을 붙잡고 줄을 서는 시숙들과 등교를 준비하는 조카들, 그리고 며느리들까지 이어진 그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정겨운 공간이었다. 시아버지는 늘어나는 식구들을 돌보느라 힘들어했다. 큰형님에게만 남겨두었던 송아지 한 마리씩, 다른 형제들에게도 나누어주시며 분가를 돕는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새벽마다 시아버지의 양손은 쟁기를 붙잡았다. 문전옥답을 일구며 온몸에 비지땀으로 적셨다. 탄광으로 출근하는 아들들 대신 며느리들은 괭이와 호미를 들고 밭의 자갈을 골라냈다. 울퉁불퉁한 밭이 평평하게 다듬고, 이내 밀과 보리를 뿌렸다. 텃밭 둘레에 심어둔 자두, 사과, 복숭아는 손자들에게 새콤달콤한 간식이었고, 가을이면 감나무가 내어주는 황금빛감은 겨울철 할아버지의 사랑이 항아리에서 숙성되고 있었다.
신혼 초, 큰 시련을 맞이했다. 남편이 군대에서 다쳐 방황하면서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동서들이 기거하는 다른 방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나의 방은 무거운 침묵만 가득했다.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며 지새운 날들, 때로는 눈물로 보내며 지쳐갔다. 혹여 섣달그믐이면 돌아올까. 캄캄한 밤중에 파란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는데, 시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시집살이를 버티게 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추위에 떨던 나를 발견한 시아버지. 고드름처럼 꽁꽁 언 내 손을 잡고 사랑방에 주무시던 시어머니 곁으로 데려갔다. 그날은 오랜만에 포근한 이불 속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시아버지가 문고리를 잡고 ‘큰며느리야! 새아기가 밤새 고열로 시달렸다며’ 둘러대시는 눈물겨운 음성, 우물가에 모인 동서들이 꾀병이라며 수군거렸지만, 아침 밥상에는 내 밥도 나란히 차려져 있었다.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새아가, 밥 먹자꾸나." 그 한마디는 나를 초등생처럼 어리광부려도 통하는 분위기였다. 농가의 일손을 돕는 며느리들이였다. 시아버지는 동기간에 화목을 도모하는 덕목을 최고로 삼았고, 인자한 사랑을 골고루 베풀며 품어주셨다. 그해 연말 솟값 파동이 일어났다. 시아버지는 황소와 송아지 딸린 암소 몇 마리 더 샀다. 뒤란에 울타리를 치고 며느리들에게 잘 키우라고 당부하셨다.
농가의 소들은 몇 사람의 일꾼 몫을 했다. 모심기 철에는 무논에서 헉헉대며 써레질을 하였다. 곡식 수확 철에는 보리 단과 볏단도 달구지에 실어다 날랐다. 그 소들이 외양간에서 새김질하며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중심이었다. 생각만 해도 정겨운 풍경을 어찌 꿈엔들 잊을까. 텃밭에는 사계절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는 야채들이 넘실거리고, 참외‧ 수박이 달달하게 익어가는 그곳,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기차가 멈추고, 탄광도 문을 닫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따뜻함은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비록 시아버지는 떠나셨지만, 그분이 남긴 기와집은 명절 때 마다 형제들이 우애를 다지는 또 하나의 울타리다. 세월이 흘러도 기억 속 항아리에는 된장향기는 코끝에 맴돈다.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날, 시아버지는 대문에 기댄 채 자식들에게 차들 조심하라는 듯, 손을 흔들던 모습이 떠올라 울컥했다.
산소에 잡초를 뽑고 들뜬 흙을 밟는다. 시부모님께 술잔을 올리며 만감이 교차한다. 시아버지가 생전에 품어준 울타리는 지금껏 세상비바람을 막아준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었던 삶의 흔적을 기억하며, 내 아이들에게 울타리가 되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