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슈스 Dec 21. 2020

남편이 사기를 당했다.

그럼에도 아인슈페너를 만든다.

푸시식, 보글보글보글.

모카포트의 좁은 입구에서 진한 커피향이 귀여운 소리를 내며 진동을 한다.


토요일 아침 9시가 되기에 살짝 부족한 시간, 늘 그랬던 것처럼 머리 위로 잔뜩 까치집을 인 남편이 부스럭대며 나온다. 아마도 커피향 때문이겠지.


"오늘은 아인슈페너 아니 비엔나커피 어때?"


NOPE! 단칼에 나의 제안을 거절하는 당신. 귀찮은 건 하지말라며 깔끔하게 아메리카노를 드시겠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거품기를 꺼내 길다란 용기에 생크림을 따르고 설탕을 한 줌을 넣은 다음, 요란한 기계음으로 휘핑을 시작한다.


"역시, 나 사기 당한거 맞아."

남편의 익숙한 한 마디. 이미 여러차례 고백을 한 터라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저 나는 아인슈페너를 위해 생크림이 더욱 단단해지기를 기다린다.




10년 전 남편을 만나고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을, 딱 그 무렵이었다. 카페 창업에 관심이 있던 친구와 함께 '중국차'수업을 듣게 되었다. 토요일 늦은 오후에 수업이 있었는데, 2시간 내도록 보이차, 황차, 세작 등등 차란 차는 다 마시며 차의 역사니 다도니 그런 것들을 공부했다. 그때만해도 주5일 근무가 정착되기 전이라 남편은 토요일에도 출근을 했다. 퇴근 후, 대구부산 고속도로를 달려온 그는 다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나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서너번, 그는 조심스레 수업을 그만두면 어떠냐고 물어왔다.


카페인 부작용


나는 카페인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또 심한 이뇨작용으로 화장실을 왔다갔다하며 긴 밤을 보초서기 일쑤였다. 그런 내가 카페인의 최고봉인 중국차를 수업하는 2시간 동안 마셔댔으니...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영혼은 몸 밖 1미터 앞에서 걷고 있었고, 방광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니 주말 고작 함께하는 몇 시간을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화장실이나 들락거리고 있었으니 그의 제안도 무리는 아니였으리라. 나는 한 번의 고민도 없이 수업을 그만뒀다.


2시간의 집중 카페인에서 벗어는 났으나 내 몸은 원래부터 카페인을 거부했다. 그래서 데이트의 필수 코스였던 카페에서 나는 항상 핫초코를 주문했다. 무언가 먹으면 흔적을 남겼던 칠칠치 못했던 성격답게 입가에 초코자국을 남겼고, 그는 늘 그 초코자국을 닦아주었다. 예쁘게만 보이고 싶은 내 계획은 항상 어긋났다.


아, 광안대교 야경이 이리도 멋진데 보드라운 크림이 올라간 비엔나커피 한 잔을 마시지 못하는구나... 우아하긴 글렀어.


이후 우리가 결혼을 하고 함께 살면서도 나는 당연히 카페인을 먹지 못했고, 그도 집에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며 동네 친구들이 생겼는데 그 중 나의 육아동지였던 소라는 커피를 무척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그녀는 가끔 나에게 커피를 한 잔 씩 사다주곤 했다. 나의 카페인 부작용을 익히 아는 터라 '낮시간', '1/2도피오', '디카페인'등의 법칙을 지켜 자극이 없는 커피의 세계로 나를 입문시켰다. 그렇게 몇 일에 한 번 씩 마시던 커피가, 어느 순간 일상이 되고 있었다.


이후 남편과 둘만 떠났던 이탈리아 여행에서 모카포트 2개를 기념품으로 구매했다. 한국에도 파는데 왜 굳이 거기서 그걸 샀냐고?


이탈리아라는 핑계로 조식 때마다 커피를 마셔댔다. 나흘째 되던 날 아침, 남편이 말했다.


아무래도 사기결혼을 당한 것 같아


결혼 전엔 카페인에 쩔쩔 매며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결혼을 하면 향이 좋은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싶다는 신혼의 로망을... 말 조차 도 꺼내보지 못했다는 남편. 그런데 이제 본색을 드러낸거냐며, 이건 명백한 사기라고 힘을 주어 말한다. 참 내, 그럼 물르든가.


아무튼 그때 '사기타령'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의 지난 시간을 보상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묻지마 모카포트를 구입했나보다.


그때부터 나는 주말 아침마다 모카포트용으로 원두를 갈고, 따뜻한 물을 담아 커피를 추출했다. 이제 아이들마저 그 익숙한 동작과 향기에 반응하곤 한다.

오늘 역시 숙련된 과정으로 맛난 에스프레소를 만들고 아침 준비를 한다.


오늘도 귀여운 '사기' 투정을 들으며 주말 아침을 그의 소원대로 시작해본다. 대신 나는 내가 늘 꿈꿔왔던 아인슈페너 한 잔으로 우아해져본다.


내가 평생 보글보글 커피 만들어줄게, 이제 사기 타령은 그~~~~만!



Bonus. 집에서도 우아한 홈카페, 아인슈페너 만들기


1. 에스프레소 30미리를 만든다.

2. 생크림 100미리에 설탕 1큰술을 넣고 휘핑한다. 이때 거품은 들어올렸을 때 뾰족한 뿔이 휘어질 정도.

3. 준비한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 150미리를 붓고, 휘핑한 생크림을 올리면 아인슈페너 완성!


+응답하라 1988 세대라면 아인슈페너 보다는 비엔나커피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어차피 같은 녀석이니 두려워말고 도전해보자.

+에스프레소를 달리 추출할 수 없다면 믹스커피의 커피를 녹여서 활용해도 좋다.

+포인트는 생크림, 오버휩 되면 크림이 커피에 섞이지 않고 너무 무르게 휘핑하면 라떼처럼 돼 버릴 수도 있으니 꼭 휘어지는 뿔이 생길 정도만 거품을 낸다.














작가의 이전글 29살의 간장게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