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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Nov 08. 2021

할머니의 사과

내 큰딸은 양가에 첫 손주이다.

결혼은 늦지 않았지만, 난임이라 결혼 4년째에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어렵게 가졌지만, 임신기간 중에는 입덧 대신 먹덧을 하며 아주 건강하게 지냈다.

원래 살집이 있는 편이었는데 임신해서 18 킬로그램이나 체중이 증가해서 보는 사람들이 숨이 찰 지경이었다.

그 몸을 해서도 출산예정일 5일 전까지 출근을 했고, 동료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한 남자동료의 걱정스러운 농담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손 과장님. 이제 출산휴가 내고 쉬어요. 과장님 그 몸으로 쓰러지면 업지도 못하고, 안지도 못하잖아. ㅎㅎㅎ"


결국 예정일을 11일이나 지나서 출산을 했는데, 이틀을 고생하며 낳아서인지 아기는 너무너무 못생겼었다.

너무 사랑스럽고 예쁜데 진짜 못생겼다. (이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래도 양가에 첫아이라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다 받고 큰 아이다.


큰 품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알아서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자랐다.

근데, 이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쓰러졌다.

성당에서 교중미사 복사 봉사를 하던 중 그대로 쓰러져서 한바탕 소란스러웠었다.

그때 주임신부님께서 미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 아이에게 오셔서

"너는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 이 많은 신자들이 너를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를 했으니까!"라고 말씀하셨었다.

검사 결과 아이는 미주신경성 실신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잠을 충분히 못 자서 피곤해도 쓰러졌고,

이비인후과에서 비염치료를 받다가도 쓰러졌고,

긴장하며 채혈을 하다가도 쓰러졌었다.



시어머니는 남편을 좋은 대학에 보내지 못하신 게 천추의 한이 되신 분이다.

그만큼 교육열이 대단하셨는데, 나는 어머니와는 달리 교육에 열성적이지 못하다.

아니, 열성적이라 해도 아이가 픽픽 쓰러지는 것을 옆에서 보면 정말 공부고 지랄이고...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도 큰애가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 어머님의 기대가 크다.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인 큰딸을 볼 때마다

"은영아~ 서울대 졸업하면 할머니가 큰 선물 사줄게~" 하신다.

그럼 아이는 "할머니! 입학이 먼저 아닐까?" 하고 받아친다.


걱정하실까 봐 그동안 아이가 쓰러졌었다는 말씀을 안 드렸는데,

어쩌다 아산병원에 있을 때 통화를 하게 되어 궁금해하시길래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그 다음번 아이를 만났을 때 어머님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셨다.


"은영아~ 할머니가 다시는 서울대 가라고 안 할 테니까 아프지 마!"

우리는 무슨 소린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어머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님은 서울대 가라는 당신 말씀 때문에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쓰러진 것으로 오해를 하셨다는...

(어머님~ 은영이는 어머님 말씀을 한쪽 귀로도 안들었...)

어머님은 미주신경성 실신이라는 것 자체가 뭔지도 모르실 테니 공부하다 힘들어서 쓰러진 줄로 아신 거다.


어제는 큰딸이 할머니와 통화를 하는데,

"은영아, 꼭 서울대 아니라도 할머니가 니 등록금은 내줄 테니까 스트레스받지 말고 살살 해~"

그렇게 걱정하는 할머니에게 아이는 할머니의 춤을 흉내 내는 동영상을 찍어 선물로 보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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