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아주 비싸고 예쁜 덕질

나의 덕질 연대기 - 구체관절인형 편


나의 덕질 연대기 - 구체관절인형 편


  가장 흑역사를 많이 생성한다는 중~고등학생 시기, 나도 지금 생각하면 꽤나 오그라드는 몇 가지 취향을 가졌었더랬다. 펑크스타일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취향/취미들 중 하나가 바로 '구체관절인형'이었다. 지금은 너무나 대중화되어 웬만한 초등학생들도 다 가지고 있는 바로 그것. 그 분야가 막 태동했을 때(?) 나는 푹 빠져들고 말았다. 예쁜 것을 좋아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좋아할 수밖에 없는 구성이었다. 


  '구체관절인형'은 보통 우레탄으로 개별 관절을 구분해 만든 인형을 일컫는데, 관절들을 줄('텐션'이라고 불렀다)로 연결해 자유자재로 포즈를 바꿀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안구부터 가발, 옷, 메이크업까지 전부 변형이 가능해서 소유자가 원하는 컨셉으로 꾸밀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능력자들이 자신의 인형을 한껏 꾸며놓고 찍은 사진들을 구경하며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인형의 소유를 꿈꿨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당시 내가 사고 싶었던 구체관절인형은 약 30~40만 원 정도였다(당시 기준으로 꽤나 비쌌다). 학생이 건드릴 수 있는 가격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세뱃돈과 용돈을 열심히 모은 나는 그 큰 돈을 그대로 인형샵에 바쳤다. 그리고 나의 첫 인형, '연하'를 갖게 되었다. 


  '연하'는 구체관절인형샵인 A사에서 내놓은 MSD사이즈(40센티미터 정도 되는 크기)의 인형 중 한 종류였으며, 원래는 남자인형이었지만 나는 여아 바디와 조립해 여자인형으로 데려왔다. '안개와 노을'을 뜻하는 한자어 '霞'라는 단어를 어렵게 찾아 이름으로 붙여 주었다. 은은한 미소와 살짝 처진 눈꼬리가 딱 내 타입이었다. 첫 인형을 데려온 나는 혹시나 낡을까 애지중지하여 잘 꺼내보지도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케이스 안에 넣어둔 채로 보냈다. 


사진: UnsplashGilbert Beltran



  그 뒤로 '연하'와 함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첫 인형을 들이고 나니 두 번째 인형이 사고 싶어졌다. 이번엔 SD사이즈(60센티미터 정도)로 사고 싶어.. 이번엔 저 헤드(인형머리만 따로 팔기도 했다)가 갖고 싶어.. 등등 늘 새로운 소유욕이 들끓었다. 특히 인형계에는 한정 문화가 있었는데, 딱 특정 수량만 팔거나 특정 기간 동안만 구매할 수 있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학생이었던 나는 더욱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대부분의 용돈을 나를 꾸미는 데 쓰기보다 구체관절인형과 그 인형을 꾸미는 데 쓰며 고등학생~대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여러 인형과 가발, 안구 등을 사 왔던 나였지만.. 궁극의 로망인 인형은 따로 있었다. 바로 구체관절인형의 탄생지(?)와 같은 일본 모 회사의 B모델 인형이었다. 그 회사는 가끔씩 한정으로만 인형을 내놓기 때문에, 특정 모델 인형을 사려면 중고 시장에서 비싼 값을 주고 사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사랑했던(사랑했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됨) 모델은 헤드만 n십만 원에 거래되며 그마저도 장터에 잘 뜨지 않는 아주 희귀한 모델이었다. 나는 각종 카페와 클럽 등에서 그 모델 인형을 가진 사람들이 올린 사진들을 검색하며 언젠가 나도 그 인형을 가질 날을 꿈꿨다. 그렇게 수년을 보낸 뒤.. 어느 날 장터에 올라온 n십만 원의 B모델 헤드를 발견한 나는 충동적으로 중고거래에 도전했고, 그렇게 꿈에 그리던 헤드를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헤드를 가진 내가 한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예상대로라면 그 헤드에 원래 되어 있는 메이크업을 지우고(메이크업을 신너로 지워야 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함), 내 취향에 맞는 새 메이크업샵을 찾아 메이크업을 맡기고, 바디를 구하고, 바디에 맞는 옷을 사고, 안구와 가발을 사서 예쁘게 꾸민 뒤에 사진을 찍어 카페든 블로그든 자랑하는 글을 올렸어야 했다. 하지만 왠지, B모델 헤드를 가지게 된 나는, 그 헤드를 구매한 그대로 잘 보관만 해두고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구체관절인형에 대한 열정도 그 이후로 왠지 시들해져 다른 인형들까지 전부 다 침대 밑에 케이스째로 보관하게 되었다. 


  지금도 내가 왜 궁극의 인형을 손에 넣고 나서 갑자기 마음이 확 식어 버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갈망하던 것을 마침내 손에 넣는 순간,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걸까? 여하간 내가 아마도 수백만 원 이상을 투자한(인형+옷+안구+가발 더하면 그쯤 될 듯) 인형 및 기타 장비들은 지금도 옷장 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보관되고 있다. 가끔은 궁극의 B모델 인형을 꺼내 놀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헤드만 덜렁 있어 그마저도 쉽지 않다.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게 되면 가지고 있는 인형들을 쫙 전시해 놓고 사진을 찍어보고 싶긴 하다. 언젠가는ㅎㅎ 그때까지는 좀 더 옷장 속에서 버텨줘 얘들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