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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안한 제이드 Aug 02. 2023

'승리'를 넘어 '행복'을 응원하게 되는 덕질

나의 덕질 연대기 - 프로게이머 편


나의 덕질 연대기 - 프로게이머 편




게임을 더럽게 못하지만 꽤나 좋아하는 아이


  어렸을 때의 나는 게임을 정말 못했다. RPG든 대전게임이든 뭐든, 단언하건대 게임 실력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하위 10%에 들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게임을 참 좋아하는 아이였다. 초등학생 때는 컴퓨터를 사면 들어있는 게임들(라이언킹, 재즈 잭 래빗 등)을 열심히 플레이했으며, 좀 커서는 용돈을 모아 닌텐도 DS를 사서 마리오, 젤다의 전설, 동물의 숲 같은 대표 소프트웨어들을 섭렵했다. 놀라운 것은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이런 게임들을 플레이하면서도 항상 공략을 찾아보았다는 점이다. 그 정도로 나는 게임 쪽으로는 재능이 거의 전무했다. 


  그러니 사람 대 사람이 겨루는 대전 게임은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상대가 컴퓨터여도 고전하는데, 심지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라고? 이건 처음부터 지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임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내가 학생 때 스타크래프트(전략시뮬레이션 장르라 불린다)가 선풍적 인기를 누리면서 관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관심은 자연스럽게 프로게이머에게로 옮겨갔다. 내가 정말 좋아하지만 정말 못하는 '게임'을 너무나 잘해서 그걸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니. 막연한 동경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프로게이머 덕질에 빠져들었다. 


사진: UnsplashDries Augustyns



1. 언더독에 대한 나의 사랑(2인자를 응원하다) : A 선수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인지도 모르겠다ㅎ 그렇지만 나는 어쩐지 대세보다는 언더독에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이었다. 테란(스타크래프트 3개 종족 중 하나)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프로게이머 판에서, 나는 언더독의 포지션에 있었던 저그를 응원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결승까지는 많이 올라갔지만 끝내 정규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는 못했던 한 선수를 좋아했다(라고 얘기하면 누군지 다 알 것 같긴 하다). 최근에 한 트위터리안이 1인자인 모 선수와 2인자인 A 선수를 각각 '이기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파'와 '강호의 도리를 지키려 하는 사파'로 비유한 것을 봤는데(기억에 의존한 거라 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 있음 주의), 정말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우직하게 정도를 지키는 게임을 하고 싶어 했던 A 선수는 결국 은퇴할 때까지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고, 그 때문에 선수생활  말년에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꽤 힘들어했던 걸로 알고 있다. 


  늘 1인자와 비교당하며 온갖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내 선수는 게임에 대한 자신의 신념(팬들에게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줘야 한다)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시기에 그는 이미 전성기를 지나서 이기는 경기보다 지는 경기가 많은 상태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응원했던 것에 후회는 없다. 가끔 이길 때는 끝내주게 멋진 명경기를 만들어서 생방송으로 온게임넷/MBC게임(게임방송채널)을 보고 있던 나를 울리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이머로서 명예롭게 은퇴하고 그 이후의 삶도 잘 살아내서 팬인 나를 뿌듯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A 선수가 내가 응원하는 첫 게이머가 되어주어서 늘 고맙다.   

  


2. 저그의 제왕, 그리고 승부조작 : B 선수


  스타크래프트의 세 종족(테란, 프로토스, 저그) 중 저그를 좋아하는 사람 중 B 선수를 응원하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임 업계(?)에서 B 선수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그간 언더독 포지션에만 있었던 저그를 단숨에 주인공으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나로선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저그라는 상대적 취약 종족으로 테란을 때려잡는 그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고 말해 본다. 나는 그런 B 선수의 전성기에 응원을 시작해, 슬럼프와 그 극복 과정을 모두 함께했다. 당시 그가 속해 있었던 팀까지 같이 응원하며 말 그대로 그가 울 때 나도 울며 온 마음을 다해 응원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응원했던 그 선수가 승부조작에 가담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얼마나 충격이었냐면 그때가 섬광기억으로 남아,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명확히 기억날 정도이다ㅎㅎ 내가 덕질했던 대상이 본질적으로 나를 배신해서 탈덕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동안은 그의 명경기 다시보기도 할 수 없었고, 소식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시간이 약이라고, 지금은 B 선수를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다. 가끔 내가 정말 좋아했던 경기는 다시 외장하드를 뒤져서 꺼내보기도 한다. 스타크래프트 업계에서 조작 문제가 터졌을 때, 한 해설자가 했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경기가 조작되었다고 해서 내가 응원했던 마음마저 거짓이었던 것은 아니다'와 비슷한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 내가 응원했던 마음은 늘 진심이었으니까. 즐거워하고 좋아했던 추억까지 다 불태워버리기엔 좀 아깝지 않을까?(물론 이런 마음과는 별개로 B 선수는 업계에서 볼드모트 취급받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B 선수 경기를 모아놓은 내 외장하드 폴더 이름이 '볼드모오오트'인 것처럼...ㅎㅎ) 



3. 어쩌다 보니 또 베테랑 : C 선수


  B 선수의 승부조작으로 너무 큰 상처를 받았기에, 다시는 프로게이머를 좋아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승패가 있는 세계에서 졌을 때 겪어야만 하는 고통에 진력이 난 상태이기도 했다. 그랬는데.. 정말 다신 안 좋아하겠다 마음먹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트위치에서 스트리밍되고 있던 리그오브레전드(LOL) 플레이오프 경기를 보게 되었고, 게임 룰도 잘 몰랐던 나는 기적같이 승리를 쟁취하고 눈물을 터뜨린 한 선수에게 빠져 버렸다. 그는 베테랑이었고, 같은 팀 선수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선수였다. 이 선수에 대해서는 이미 브런치의 다른 글('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참조)에서 길게 다룬 적이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려 한다. 어찌 되었든 나에게 롤 프로게이머 덕질에서 최고의 순간(롤드컵 우승)을 경험하게 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Beyond the game


  아주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WCG라는 전 세계 게임 대축제 같은 행사가 매년 열렸었다(요새도 열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당시에는 유일했던 국제 공식대회도 열렸기 때문에, 나름 올림픽처럼 국가대표로 WCG 대회에 나갈 선수를 뽑는 선발전을 따로 진행하고 했던 기억이 난다. 여하간 그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 WCG라는 행사의 주제가가 있었는데, 나는 이 노래가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의 의미를 나타내준다고 생각한다. 노래의 제목은 'Beyond the game(게임 너머에)'이다. 


You and I, We have met before

Through the magic of a moment in Cyberspace

Driven by a passion to win

Playin' heart to heart, face to face

The challenge of a lifetime

Stands before us now


Beyond the game

in the shadow of the golden gate

We have come to decide our fate

We're here to celebrate

Beyond the game

Beyond the game

At last the moment's at hand

All we need is to believe we can

We'll make our stand

Beyond the game!


...(이하 생략)



  프로게이머란 직업이 만들어진 지 20년 넘게 시간이 흘렀지만, 게임을 업으로 삼는 것에 대해 여전히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난 이 노래 가사를 보여주고 싶다. 프로게이머에게 '게임'은 단순히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프로 스포츠와 동일하게, 그들은 승리의 환희를 느끼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팀원들끼리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힘을 합쳐 승리했을 때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선수(또는 팀)의 팬이 함께한다. 돌이켜보면 그 속에는 분명, 단순한 승리와 패배 이상의 감동과 행복이 있었다. 결국 그 감동을 한번 맛보면, 프로게이머의 팬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승패를 넘어선 행복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덕질, 그게 내가 생각하는 프로게이머 덕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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