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덕질 연대기 - 일본연예인 편
어쩌다 시작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정신을 차려보니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인터넷으로 일본 노래를 열심히 찾아 듣고 일본 예능을 저화질로라도 찾아보고 있었다. 특히나 내가 좋아했던 장르는 J-ROCK이라 불리는 락 장르였다. 일명 비주얼 락이라는 지금 생각하니 괴상한? 이름으로 불렸던 장르에도 심취했었다. 막 전주만 3분이 넘어가는 엄청난 노래들도 많았는데, 당시 말 그대로 중2병이었던 내게는 그런 비장하고 슬픈 감성이 딱 먹혀들어갔다. 사실 노래는 정말 좋아서 지금도 종종 생각나면 CD를 주섬주섬 꺼내서 재생하곤 한다ㅎ
여하간 그렇게 좋아했던 락 가수 중 한 명이 당시 여러 예능에서 활약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일본 예능에도 발을 들이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당시만 해도 일본 예능을 공식적으로 볼 수 있는 루트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부분의 일본 예능은 누군가가 관련 다음 카페에 올려주는 비공식 영상+자막으로 봤다. (저작권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일본에서 방송하고 얼마 지나면 카페에 능력자 덕후가 직접 만든 자막을 붙인 영상이 게시되었는데, 그걸 되게 열심히 챙겨봤던 기억이 있다. '도모토쿄다이'나 '우타방' 같은, 게스트가 나오는 음악+토크 프로그램을 유독 좋아했다. 최근에 백예린이 부른 버전으로 화제가 되었던 'lalala love song'도 이 시기에 보아가 도모토쿄다이에 나와서 부른 버전으로 듣고 좋아서 가사를 외웠었다. 이때만 해도 일본어를 아예 모를 때라, 의미도 모르는 한글발음의 나열을 그대로 외우는 수준이었다.
고등학생~대학생 때는 뒤늦게(?) 일본 여자아이돌에 푹 빠져 지냈다. 그때는 덕질이라고까진 생각 안 했던 것 같긴 한데, 돌이켜보면 거의 덕질 수준이었다. 일본 모 유명 여자아이돌의 노래(데뷔한 지 오래된 아이돌이라 싱글 타이틀만 수십 개였다)를 MP3에 넣어서 공강 시간마다 들었다. 대부분의 노래는 친절한 덕후들이 번역해 준 가사가 있기에 일본어+한글발음+한국어뜻의 세 줄이 기본인 (덕후들이 만든) 가사집을 보며 달달 외웠다.
과제하느라 지치고 힘들 때는 좋아하는 아이돌의 콘서트 영상을 틀었다. 밝게 웃으며 몇 시간 동안 지치지도 않고 공연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돌의 키라키라(반짝반짝)한 모습을 보며 나도 에너지를 채웠던 것 같다. 예쁜 여자아이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올 라이브로(!) 노래하는 걸 보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J-ROCK에서 일본 예능, 그리고 일본 아이돌까지 좋아하게 되면서 일본어에 궁금증이 생긴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도 자막 없이 노래 가사를 이해하고 싶었고, 예능 새 에피가 나오면 자막 없이 내용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부모님을 졸라서 구몬 일본어를 신청해 거의 독학을 시작했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외우고 문법을 공부했다. 사실 일본어를 공부하기에 너무나 좋은 환경이었다. 매일매일 자청해서 일본어 리스닝과 리딩을 하고 있던 거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영어 공부하기 위해 억지로 타임스 기사를 읽고 영어로 된 영화를 돌려보고 하지 않는가? 그 당시의 나는 일본어에 대해서는 이미 그런 과정을 심지어 매우 즐겁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니 귀가 트이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때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많은 학교들이 교과과정에 있는 제2외국어로 중국어or일본어를 선택하게 했다. 그 말인즉슨 학교에 제2외국어 선생님으로 중국어or일본어 선생님이 상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시골에 있었던 내 고등학교에는 예전부터 계셨던 프랑스어or독일어 선생님이 계셨고, 아마 높은 확률로 그 이유로 우리 학교의 제2외국어는 프랑스어or독일어 중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나는 프랑스어를 골랐는데, 공부에 통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프랑스라는 나라나 그 나라의 문화에 관심이 1도 없는데 복잡한 언어를 배울 마음이 들 리 없었다. 대신 집에 가서는 일본 노래를 듣고 일본 예능을 보며 일본어를 스스로 공부했다.
그렇게 고2~고3 시간이 지났고, 수능에 응시하며 제2외국어를 골라야 하는 시점이 왔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나는 결국 제2외국어 과목으로 일본어를 골랐다. 2년 동안 학교에서 배운 프랑스어보다 내가 독학한 일본어 실력이 더 나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ㅎ 다년간의 덕질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대학교에 가고 나서도 일본 아이돌의 노래를 주로 듣고 다녔다. 이때쯤 용량이 꽤 늘어난 핸드폰에는 제일 좋아하는 콘서트 영상을 넣어서 공강 시간에 보곤 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로 올라온 나는, 강남에 있는 유명한 일본어 학원에 등록해 수업을 들었다. 일본어 기초 과정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JLPT 1급(일본어능력시험 제일 높은 급수) 반까지 섭렵, 결국 JLPT 1급을 손에 넣었다(허허허). 거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일본어 회화반에 등록, 나중에는 회화반 중 제일 높은 등급(상급)까지 올라갔다. 당시 굉장히 열성적으로 회화를 가르쳐주었던 원어민 선생님(센세)은 내가 리스닝과 스피킹을 아주 편하게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었다. 센세, 그건 다 다년간의 일본 노래 청취+예능 시청 덕분이라고요! 그렇게 일본 문화 덕질은 나에게 일본어 능력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그래서 일본어 능력이 내 인생에 되게 도움이 되었냐 하면,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다^^;; 물론 취업할 때 토익 점수 말고도 내밀 수 있는 외국어 능력이 하나 더 있다는 게 자신감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내가 무역회사 같은 곳에 취업하려 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회사는 영어시험 성적 외 다른 외국어 성적을 기재하는 칸조차 마련해놓지 않았었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는 더더욱 일본어를 쓸 일이 없었기에(일본과 1도 관련 없는 공공기관임) 내 일본어 실력은 영어실력과 함께 꾸준히 퇴화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그 모든 것이 의미 없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도 일본 여행 가서는 대충 일본어로 이것저것 물어보며 다닐 수 있는 회화 실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본 사이트에서 번역기를 돌리지 않고도 직구 정도는 할 수 있다.(이걸 나는 돈 쓰는 일본어라 부른다ㅎ 돈 버는 건 못하지만 쓰는 건 가능한 수준) 그리고 아주 가끔 예전에 좋아했던 일본 아이돌의 영상을 볼 때 자막 없이도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기도 하고, 언니가 보는 뜨개질 책(일본 쪽 뜨개질 시장이 발달해서 원서를 종종 구해 본다) 내용을 해석해주기도 한다. 일상에 플러스알파의 즐거움을 더할 수 있으니, 이 정도면 덕질은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BTS가 해외에서 성공한 것이 한국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 무슨 소용이 있냐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해 봐서 아는데(해봐서 아는데 마리야), 문화는 생각보다 그 나라에 대한 인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나 또한 일본의 노래와 예능을 보기 시작하면서 일본 문화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본어를 공부했다. 지금 BTS를 좋아하는, 그리고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수많은 외국인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니 한국 문화가 외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때마다 한국인으로서 덩달아 신이 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 수 있겠다(참고로 나는 BTS 팬은 아니다). 나 또한 어렸을 때 그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