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과 닻과 돛에 대한 쓰기

글이라는 이름이 주는 구속과 해방

by 박정호

[1] 시인의 말

이빨과 발톱이 삶을 할퀴고 지나갔다

내 안에서도 이빨과 발톱을 지닌 말들이 돋아났다

이 피흘리는 말들을 어찌 할 것인가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

시인이 된 지 삼십년 만에야 이 고백을 하게 된다

- 나희덕 시집, 『파일명 서정시』에서

나희덕의 시집 『파일명 서정시』의 마지막 쪽 “시인의 말”을 그대로 옮겨 왔다.

시는 닻이고 돛이고 덫이라는 말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시인의 삶에서 떨쳐낼 수 없는 구속이자 해방, 그리고 삶 그 자체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시인의 말에 기대어,

서순을 달리한 부끄러운 수필을 쓴다.

[2] 마감의 덫

명찰을 벗는다.

벗어놓은 명찰에는 이름이 없다.

나의 이름은 오늘 하루 대학수학능력시험 대구지구 제○시험장의 제□감독관.

민원이 빗발쳐 이름을 지워 놓았다지만,

이름을 지운들 책임은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는 명찰을 벗으며

무사히 책임을 벗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돌려받은 휴대폰에 쌓인 알림 가운데

‘수능수당 18만 원 입금’ 이력을 읽으며 만족한다.

나는 명찰을 벗으며

명찰을 패용하지 않았지만

수험생이라는 이름을 지고 살았던

학생들의 [해방]에는 더는 공감하거나 연민하지 않는다.

비가 오는 수능일에

우산을 쓰고 교문 앞에서 내내 기다린

하여 수험생의 부모라는 이름을 지고 살았던

아버지, 어머니의 [해방]에도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피곤하거나 노곤해서 그랬다고 하고 싶지만

수험생활에 대한 연민보다는

일당 18만 원이 주는 만족과 안도에 더 마음이 감응하는 까닭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지구온난화 때문에 수능일에도 춥지 않았던 이상기후 현상처럼

내 마음에 닥쳐 온 불가역적인 변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하철에 오르며

미처 읽지 못한 메시지들과

노션에 옮겨 놓은 오늘 할 일을 읽는다.

□ 해방에 대한 글쓰기:

당신은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나요.

그리고 오늘은

오늘만큼은 정말

마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2] 생활의 닻

2023년 11월 17일, 하우스디어반 2014호를 처음 찾았던 하루를 잊지 못한다. 이런 곳을 와도 될까. 학령을 놓친 만학도처럼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던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벨을 누르고, 5초 정도 지났을까. 덜컥 풀리던 잠금 장치와 더 없이 밝게 반겨주던 인삿말, 넓지 않은 방이었지만 한없이 길게 느껴지던 내실(內室)의 복도도 생각난다. 고급스런 선의가 묻어나는 말들과 여유로 가득찬 눈빛들을 마주하는 일이 쉽지 않게 느껴졌다. 그 순간 아주 잠깐은 ‘집에서 아기나 볼 걸’ 하고 후회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곳의 첫인상은 낯섦이었고, 낯섦 속에 웅크린 내 모습이 위화감이 들 만치 부조화스럽게 느껴졌다. 뭐랄까. 영화 「타이타닉」의 1등실 선상파티에, 디카프리오 대신 내가 초대받은 기분이랄까. 그곳에서 세 시간을 대화한다는 사실이 더 없이 걱정됐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힐링푸드’를 주제로 쓴 각자의 글을, 윤독으로 대화로 함께 나누는 시간이, 문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즐거웠다. 공무(公務)와 육아(育兒)가 아닌 다른 영역의 삶이 내게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글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글쓰기를 좋아하는 분이 함께 하게 되어 너무 기뻐요! (보림 님)

어쩐지 혜서, 이주, 종호, 정원 님처럼 오랜 씀 식구가 되는 것 같은 기분. (민진 님)

- 2023 겨울시즌 마음씀 1회차, 롤링페이퍼에서

모임을 마치고 돌아온 후 서재에 앉아 혼자 롤링페이퍼를 거듭 읽었던 새벽도 생각난다. 나의 글과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해 준 필친(筆親)*들의 격려에 감사하고 뿌듯했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공감이 될 수 있구나. 글을 매개로 대화하고, 그것을 나누는 사람들과 매주 만날 수 있구나. 글을 매개로 한 대화와 사람 사귐. 그것은 마음씀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나는 마음씀을 통해 비공식적으로나마 지면(紙面)을 얻어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마음씀은 그렇게, 내게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 마음씀의 일상에선 네 번의 글을 쓰면 한 달이 간다. 열두 번의 글을 쓰면 계절이 간다. 달의 위상으로 계절을 가늠하듯, 마감의 위상으로 시간을 가늠한다. 나는 그 가늠을 기준으로 일상을 산다. 매주 한 번 어김없이 책상에 앉아 골똘히 고민하고 생각을 쓴다. 그 어김없음에 기댄 나의 글쓰기에 [생활의 닻]이라는 이름을 붙여 본다.

*필친: 보통의 글쓰기 모임에서는 서로 글을 나누고 공부하는 사람을 '학인' 따위의 말로 지칭하곤 하는데, 우리 모임에서는 공부보다는 글로 교감하고 친분을 맺는다는 의미로 '필친'이라는 말을 쓴다.

[3] 생각의 돛

우리는 매주 글을 한 편씩 쓰며,

나를 돌아보는 습관을 함께 만들어 갈 거에요.

깊이 있는 글쓰기 주제를 정성껏 준비해 드릴게요.

- 마음씀, 클럽 소개문에서

매주 한 편의 주제를 받는다.

주제를 받으면 종이를 펼치고 글을 구상한다.

글을 구상하는 일은

흡사 [생각의 돛]을 달고 바다로 나아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마음의 풍경을 목도한다.

그것은 쓰기를 통한 자기 반성으로만 얻을 수 있는 행복과 성취다.

그래서 나는 늘 [마감의 덫]에 걸려 허덕이지만,

[생각의 돛]을 달고 나아가는 일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것이 내가 내린 [생활의 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24.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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