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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Jan 31. 2024

부대, 열중쉬어

1999년 5월 17일, 경기도 양주 덕정역 근처에 있는 어느 군부대에서 아카시아 꽃내음이 흩날리고, 논마다 모내기를 위해서 열심히 물을 대던 그날 아침이었다. IMF가 한창이던 그 시절에 나는 26개월의 의무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다. 그리고 40대 후반이 되어서도 아직도 재입대하는 악몽을 꾸는 걸 보니, 분명히 대한민국 군필 남자인 것 같다.


군대에서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대대장이 연병장에 모든 부대원을 집합시키고, 군인정신을 무장하는 시간을 갖는다. 또 유격훈련, 기동훈련, 혹한기훈련을 떠나기 전에 대대장한테 신고하는 시간에도 꼭 연병장에 모인다. 그러면 집합하기 1시간 전부터 각종 병기를 갖추고, 오와 열을 맞춰서 준비를 한다.


그리고 일종의 제식이 준비되면, 대대장에게 받들어 총을 하여 “언제든지 전투준비가 되어 있음 “을 신고한다. 그러면 대대장은 경례를 받고 ”부대, 열중쉬어“ 구령을 하고, 우리는 다리를 어깨너비까지 벌리고, 왼손으로는 총기 개머리판을 바닥에 두고 오른손은 뒤쪽 허리춤에 옮기고 소위 약간의 ”짝다리“를 한 채 대대장의 긴 훈화말씀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나중에 제대하고 생각해 보니 “열중쉬어”라는 말은 ”열 가운데에서 쉬고 있으라. “는 의미였다. 그러니 우리는 전투에 바로 준비할 수 있는 상태(열중)에서 잠깐의 쉼을 허락받은 것이다. 때로는 사관학교 임관식에서 군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참석해서 사관생도의 부대에게 경례를 받고 “부대, 열중쉬어”라는 구령을 부친다. 그 의미는 오늘만은 막중한 의무감과 책임감 상태인 “열중”에서 잠깐 ”쉬어 “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우리나라는 너무 학생, 직장인, 엄마, 아빠, 아들, 딸, 선생님, 공무원, 자영업자, 취준생, 심지어 백수까지도 ”열중“에 있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 압박감 속에 살고, 쉬고 있으면 뒤처진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끝없이 러닝머신(트레이드 밀) 위를 달린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부대, 열중쉬어”가 필요하다. 열 가운데 (열중)에서 잠시 총기는 바닥에 내려두고, 두 발을 어깨너비까지 벌리면서 약간 짝다리를 짚으면서 오른손은 허리 뒤춤으로 옮겨본다.


그리고 대대장님의 지고지순한 훈화말씀 대신에 드높은 하늘을 보며 새가 되어 창공을 날아오르기도 한다. 또한 저 멀리 집에서 아들 걱정하고 있는 엄마, 아빠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고무신 거꾸로 신을지 걱정되는 여자친구 생각도 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열중”에 있지만 “부대, 열중쉬어“의 시간을 잠시 가져본다. 우리는 너무 ”열중“에 서 있으면서 ”쉬어 “를 하지 못하고 계속 경계상태에 살아가고 있다. 가끔 대대장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부대, 열중쉬어” 난 오늘도 무심하게 드높은 하늘을 올려보며 짝다리를 짚고 새가 되어 창공을 날아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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