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서 만나는 러시아
고등학생 시절, 죄와 벌을 완독 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그 시절 고등학생 필독서 100권에 어려운 책들만 잔뜩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청소년 시절 방황하던 나에게 커다란 기쁨과 사색을 가져다준 책이었습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작품은 등장인물의 이름만 들어도 어질어질했습니다. 광대하고 차디찬 시베리아를 가진 러시아 제국이 가져다준 이미지는 저에게 무척 낯설었습니다. 그나마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는 지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러시아 문학이 안겨준 선물입니다.
그러다가 클래식 음악을 접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차르트, 오스트리아 제국 베토벤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로 독일, 오스트리아의 게르만 계열의 클래식을 듣다가 러시아 제국의 슬라브 음악을 들었을 때 무척 색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클래식 음악이 시대별로 변화하면서 처음에는 고전주의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고전주의 말기에 베토벤이 낭만주의의 씨앗을 틔웁니다. 그리고 낭만주의 음악은 러시아로 넘어가서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러시아 클래식을 만들어 냅니다.
저는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평상시에 숫자, 공식, 논리적 사고를 주로 합니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서 원인과 결과를 유추해 나갑니다. 그리고 유추한 가설에 의거하여 개선점을 착안하고 이를 현실에 반영하여 문제를 해결코자 노력을 합니다. 음악으로 치면 고전주의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의 영역 외에서는 낭만주의를 더 좋아합니다. 물론 바흐의 평균율 클라이버를 듣고 있으면 음악도 논리와 같아서 매우 아름답고 간결한 선율에 빠져듭니다. 그렇지만 제가 좋아하는 곡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나 교향곡 6번 비창 같은 곡입니다. 인간은 이성과 감정을 가진 인격체입니다. 때로는 격한 감정으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차이콥스키는 그 시절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대에 퇴보한 "고전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러시아 내에서 민족주의 음악과는 거리가 멀다가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억누르는 듯한 감정을 읽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잠시 터져 나오는 감정을 읽게 됩니다. 격한 감정을 억누르다가 마침내 터져 나오는 감정의 극대화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다시 감정을 추스르는 음악적 전개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저는 "삶이 나를 속이는 일"을 겪고 나면 꼭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E장조 전악장을 즐겨 듣곤 합니다. 그러면 분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던 내 마음이 어느덧 격정적인 카타르시스와 함께 해소되는 치유의 경험을 얻게 됩니다.
또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도 즐겨 듣는 러시아 클래식 레퍼토리입니다. 그가 성공적인 20대 초반 시절 이후 계속되는 실패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니콜라이 달 박사로부터 치유를 받고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합니다. 그리고 그 곡을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을 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고 있으면, 나 스스로를 거울로 계속 들어다 보는 기분입니다.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내 속에 있는 나를 위로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작아져 위축되어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걸어가는 풍경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도 즐겨 듣습니다.
그렇게 러시아 두 거장의 음악은 저에게 치유의 약 같은 존재입니다. 비록 지금은 적도 근처 인도네시아에서 일하고 있지만, 서늘하고 차디찬 러시아 두 사람의 음악을 들으며 시베리아의 광활한 북극 찬바람을 맞으며 제 영혼을 깨우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 세계에 어려움을 주고 있지만,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가 선사한 치유의 음악을 생각하면 약간의 이해심도 생기기도 합니다. 아직 러시아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꼭 러시아에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E장조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저는 울고 웃으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이 나를 속인다면, 한번 속는 셈 치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러시아에는 푸틴만 있는 게 아니라 톨스토이,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는 삶을 속이지 않고, 비창한 마음이지만 나를 믿으며 시베리아 평원을 달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