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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Aug 30. 2024

옷깃이 다 젖도록 울었다

박연과 하멜, 두 사람 이야기

1653년 10월 29일, 조선 한양에서 옷길이 젖을 때까지 울었던 두 사람이 있다. 1627년 동인도회사 소속의 사략선(정부로부터 허가받은 해적선)에 탑승한 1명은 나포한 중국 상선을 동인도 회사 본부가 있던 바타비아(현재 자카르타)로 인계하기 위해 항해를 하다 태풍을 만나서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다. 그는 원래 명나라와 일본으로 송환할 계획이 있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이 생겨 조선에 귀화하였고, 한국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 자식을 낳기도 했다. 또한 서양의 총포 기술을 조선에 전수해 주고 지금으로 치면 수방사인 훈련도감에서 군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첫 번째 주인공은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이(1595년 생)이고, 우리에게는 박연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1653년 여름 무렵에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에 제주도 인근에서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좌초하게 된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그는 제주도에서 얼마간 머무르다가 효종의 명으로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조선에 끝내 터를 잡지 못하고, 수차례 탈출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1666년 일행 8명들과 함께 탈출하여 당시 네덜란드 공관이 있던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네덜란드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에 체류하하는 13년간 못 받은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제출한 증거로 쓴 내용이 바로 "하멜 표류기"이다. 두 번째 주인공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1630년 생)이다.

 

두 사람은 각각 태어난 해가 각각 1595년, 1630년이니깐 나이차이가 35살이다. 지금으로 치면 한창 아버지뻘쯤 되고, 그 시절에는 작은할아버지뻘 쯤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양으로 압송된 1653년 당시에 하멜은 23살이었고, 박연은 58살이었다. 그 당시 박연은 혹시나 동향사람을 만날까 하는 기대로 갔다고 한다. 드디어 박연은 하멜과 함께 표류한 36명의 네덜란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조선에 귀화한 박연은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를 많이 잊어버려서 처음엔 대화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곧 이내 네덜란드어로 대화를 하면서 점차 잊어버렸던 모국어를 기억하고 원활하게 대화했다고 한다. 그 당시 만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윤행임의 석재고라는 책에서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마음속 한편이 짠해지고, 뭉클해져 왔다.

 

두 사람의 대조되는 인생은 이역만리 타향에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화두를 던진다. 나 또한 인도네시아에서 약 7개월간 머무르면서 371년 전에 두 사람의 심정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벨테브레이는 어찌어찌하여 조선땅에 살면서 조선여인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직장도 구하면서 나중에는 귀화하여

조선인 박연으로 살았다. 이에 반해 하멜은 조선땅을 수차례 탈출시도를 하고, 고진감래 끝에 일본을 거쳐서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에 도착한다. 한 사람은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조선인으로 살았고, 또 다른 사람은 끝끝내 조선에 살면서도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인도네시아에 온 지 이제 7개월밖에 안되었지만, 난 과연 "박연"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멜"로 살 것인가? 인도네시아에 적응하며,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함께

교류하며 인도네시아 문화를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교류를 하되 끝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물론 나 같은 경우 해외주재원으로 왔기 때문에 박연의 삶보다는 하멜의 삶에 더 부합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솔직히 40대 후반의 나이에 인도네시아에 와보니, 지금껏 살아왔던 한국으로서의 정체성이 너무도 강한 탓에 아무래도 "하멜"로 살게 될 것 같다. 해외에 오니, 박연과 하멜 두 사람의 대비되는 삶이 무척 흥미롭기도 하고,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결말을 가졌던 두 사람이지만, 1653년 10월 29일 그날에는 두 사람이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 나도 여기에 와서 동고동락하고 살아가는

동료들을 만난다. 그때마다 때로는 옷깃이 다 젖게 되는 감정을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함께 왔던 동료 중에 한 명은 일찍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박연과 하멜 두 사람의 삶에 닿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내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기도 하고, 귀가 입에 걸리도록 웃기도 한다. 2024년 8월 29일 그날은 인도네시아에서 수많은 박연과 하멜이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 그렇게 역사는 반복되고, 인생은 계속된다.

 

2024년 8월 29일 어느 밤

정윤식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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