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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Dec 09. 2022

마음의 무게

창을 열고 바깥공기를 받아들인다.

아침에 일어나 차가운 겨울 냄새를 맡고 나서야 비로소 커피 냄새가 향기로운 요즘이다.

회색 같기도 흰색 같기도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빛깔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멍을 하다 갑자기 불안감이 뭉게뭉게 솟아오름을 느낀다. 이 불안감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문득 기찻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길도 끝도 기차선로처럼 붙박여 있는 삶.

시작부터 끝까지 예정된 삶을 살면서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난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을 만나고, 열심히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고 혼자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요 며칠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처럼 마음이 무겁다.

구름은 무거울까, 아니면 가벼울까. 동화에서 자주 주인공이나 천사들이 구름을 타고 등장하는 걸 보면, 구름은 생각보다 무거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의 무게는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다.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볶다 만 야채처럼 풀 죽어 있는 내 마음. 뭘 해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자꾸만 고개를 떨구는 내 마음.

그 무게 때문에 몸도 가누기 힘들어진다.

추워지기 시작해서 ⎯ 예전에 짧은 소매 차림으로 겨울을 활보하고, 이곳으로 이사 올 때도 따뜻한 곳에 남은 친구들이 "넌 거기서도 하나도 안 추울 거야"라고 말하던 걸 듣던 나는 이제 더 이상 추위가 반갑지 않다.

진행 중인 건강검진이 길고 초조해서  ⎯ 우리나라에선 반나절이면 충분한 검사들을 사나흘 간격으로 뚝뚝 떨어져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 병원에 가고 또 가야 하는 이곳 시스템에 이제 이골이 날만도 한데.

연말이라서  ⎯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데 통화 말고는 닿을 길이 없다. 신세계 백화점 크리스마스 점등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당장 눈앞에서 볼 수가 없다. 걷거나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없는 거리감을 연말이면 어김없이 피부로 느낀다.

어제저녁 같이 마시려고 한 잔 가득 따라놓은 와인을 남편이 홀랑 다 마셔버려서 ⎯ 웬일인지 와인이 유난히 당겨 몇 모금 마셔야지 했는데, 어느새 한 방울도 없었다. 한 잔 더 따르면 되긴 하지만, 가끔 그의 무심함이 야속하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고플 땐 더 그렇다.


언제나 앉는 주방 카운터 탑에서 창가의 낮은 테이블로 자리를 바꿔본다.

내 마음처럼 여전히 무거운 하늘. 구름이 하늘을 덮은 게 아니라 하늘이 통째로 구름이 된 것 같다.

브런치를 열자 '어린 시절의 나와 만나고 싶어서, 소중한 순간들을 붙잡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라는 작가 소개 글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인정받고 위로받고 싶던 어릴 적 마음이 생각난다. 이제 그걸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거다. 내가 나를 인정해 주고 위로해 주고 싶은 거다. 그러면서 옛날의 나, 지금의 나, 앞으로의 내가 만나게 되겠지.

'나'로 돌아와 다행이다. 나의 축제, 나를 위한 축제다.

정해져 있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어도 괜찮다. 누가 내 길을 정해 놓았든, 내가 아는 건 지금 이 순간뿐이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다는 것뿐이다.


건너편 건물 굴뚝에서 날아오르는 연기를 보며, 문득 내 마음이 구름이 아니라 연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향기로운 연기가 되어 여기저기 닿아보고 싶다. 훨훨 움직이고 싶다. 

어릴 적 만들고 놀던 종이컵 전화기가 생각난다. 컵 바닥에 조그맣게 구멍을 내어 실을 꿴 다음 두 개의 종이컵을 연결한 종이컵 전화기. 컵에 대고 말을 하면 소리의 진동이 실을 타고 저쪽 편 컵으로 전달된다. 

마음속 실뭉치를 풀어 그리운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본다. 내 마음의 진동이 보이지 않는 실을 타고 그들에게 가 닿으면 좋겠다.

천진한 종이컵 전화기처럼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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