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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Feb 07. 2024

낙엽

오글오글 2

몹시도 차운 바람. 어느 날 그 바람 속에서 상큼한 향기를 느꼈다.

오래전부터 손대지 않던 시집을 책장에서 꺼내 들고, 나는 한동안 멍하게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먼지가 수북한 빛바랜 그것에서 이미 퇴색해 버린 기억들을 읽을 수 있었다. 상념의 그림자도 함께.

어느새 거리에 섰다. 언제나처럼 찾아온 나의 답답함을 혹시나 하소연할 곳이 있을까 하여 어둠 내린 거리를 사람들 사이에 섞여 무작정 걷고 있었다. 찬란한 네온사인, 사람들의 고함 소리, 레코드 가게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문득 볼에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하늘을 보았다. 까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밤하늘. 나는 온몸으로 그것이 내려주는 촉촉한 냉기를 받아 안았다.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그들의 무심한 발길에 차이고 빗물에 젖어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거리의 낙엽들. 지난날의 영화를 가슴에 안고 외로움을 토하는 그들.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고 사라진 슬픔의 흔적에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그들.

"릴케를 알아요?"

풋풋한 향내와 따사로운 온기가 주위를 감싸는 듯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영롱한 눈동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노란 레인코트는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한 외로움을 토하고 있는 듯했다.

"시인이죠, 아마? 근데 왜 내게 우산을 받쳐주죠?"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춥지 않아요?"

춥지 않냐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조그만 찻집 앞에 와있었다. 뭔지 모를 힘에 이끌려 나는 그녀와 네모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환한 조명 아래 그녀의 레인코트가 눈이 부셨다. 얼음장같이 차가웠던 나의 마음은 그녀의 부드러움과 달콤한 차의 온기 속에 서서히 녹고 있었다.

"아까 릴케에 대해 물었죠?"

"그래요. 그렇지만 중요한 건 아니에요. 시든 꽃잎 같은 거예요."

"시든 꽃잎?"

그녀의 신비스러운 미소가 나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꽃잎의 시든 모습만 봐요. 꽃잎 그 자체의 의미는 무시한 채."

"꽃잎 그 자체의 의미?"

그래, 우리는 정말로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무의미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날 우린 서로를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틈에 우리는 또 걷고 있었다. 이미 셔터가 내려진 길가의 가게들이 피곤한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이따금 술 취한 사람들이 웅얼대는 소리가 밤의 고요함을 침범하고 있었다.

"당신 자신을 되찾으세요." 그녀가 문득 침묵을 깨뜨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 말고 또 누가 내가 될 수 있나요?"

"당신의 답답함은 당신 안의 문제죠.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어느 이름 모를 거리의 가로등 아래였다.

"당신의 잃어버린 언어를 찾으세요."

"나의 잃어버린 언어?"

"그래요. 찾으세요. 당신의 언어를. 당신의 의미를."

생각 속에 잠겨 나는 그녀가 멀어져 가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앞에 펼쳐진 낡은 시집을 발견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릴케의 시 한 구절이 소녀의 말과 한데 섞여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찾으세요. 당신의 언어를. 당신의 의미를."

살짝 무언가가 바닥에 흘러 떨어졌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언제 어디서 주웠는지 모르는 마른 낙엽이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요, 바로 당신이었어요.

⎯ 고 2, 가을에.



아, 너무 오글거리는 나머지 심장이 다 찌르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옮겨 쓴 이유는 나에 대한 기록이란 의미가 가장 크다. 이렇게 대책 없이 감상적이었던 그때의 나를 받아들이고 좋아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이 글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옛날 카세트테이프를 듣다가 노래들 끄트머리에 녹음돼 있는 걸 우연히 발견하고 받아쓴 것이다. 기억에 없던 글이라 무척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녹음을 듣자마자 신기하게도 이 글을 쓸 때의 마음과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춘기 한가운데에서 나는 몹시 쓸쓸했던 것 같다. 겉으론 그리 요란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깊이 앓았던 게 나의 사춘기였다. 경쟁과 학업의 부담 속에서 삶의 꽃 피움을 미뤄야 했던 시절이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대학 입학 후로 미루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나의 의지보다는 주위의 시선과 어른들의 지시가 더 중요하다고 배웠던 시절이다.

글 속의 소녀는 낙엽이자 나 자신이었다. 나는 그 시절 릴케의 서정적인 시들에 매료돼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 오히려 나는 그토록 쓰고 싶던 글을 쓰지 않았다. 신입생이던 어느 날 학생회관 대자보를 읽고 나서 나의 글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글을 쓰며 살리라 품었던 꿈도 접었다. 나 자신이 미워서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글도 싫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며 나는 내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벌써 오래전 책갈피 속 낙엽, 바로 나 자신이 나에게 해준 말대로 나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은 내가 첫 번째 사춘기의 나를 만나게 된 건 작은 기적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꿈을 꾸고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그때와 달리 지금은 꿈을 미루지 않아도 된다는 것, 조금은 더 자유로워졌다는 게 나를 들뜨게 한다.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오스트리아의 시인, 소설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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