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04월 25일 읽고 있는 책
어제까지 모르는 사람이었다가 하루아침에 아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아는 사람이 되면. 그때부터 그 주변에 일어나는 일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축하와 근심을 나누게 된다. 마찬가지다. 한 번이라도 글로 만나본 작가의 이름이 SNS나 신작 코너에 뜨게 되면 관심이 간다. 글로 만났고, 재미있게 읽었다면 더욱 관심이 가게 마련인데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새 작품에 기대와 함께 도서관에서 빌리는 대신 직접 구매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팬심이라고 해도 좋고, 일종의 이웃사촌 같은 마음이다(요즘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사라지고 있겠지만). 심너울 작가는 도토리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과학 소재로 꾸린 해에 초대된 작가다. 소설가 초대는 보통 내가 맡고 있어서 검색하며 알게 된 작가다. 그전까지 책도 한 번 읽어본 적 없던 관계에서 이제 내가 아는 사람 범주에 들어온 것이다. 사회자를 맡은 내가 질문하고 작가의 대답하는 형식의 강연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며 사담 몇 마디에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내가 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고맙고 친절한 작가다.
그러니까 지금 읽고 있는 <갈아 만든 천국, 심너울> 책도 일종의 친근함을 나름 표현하고 싶어서 구매했다고 할 수 있으나, 작가가 지금까지 쓴 작품들보다 한층 연마된 작품으로 읽힌다. 나이가 어린 작가라고 해서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는 없지만, 뾰족뾰족했던 특유의 분위기를 다듬어 주변과 잘 어울려 파도의 곡선처럼 부드럽고 매끄럽게 글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읽는 중이다. 작년 어느 날, 작가가 인스타 스토리로 자신이 쓴 글을 지금 읽고 피드백 주실 수 있는 분 찾는다는 알림을 올렸다. 이미 11시가 훌쩍 넘은(자정도 넘었는지 가물거리니까) 시간이지만 주말 같은 날이었기에 읽고 싶다고 DM을 보냈더니 파일을 보내줬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글을 읽고 피드백을 남겼던 때가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SF 소설이었고, 짧은 내용의 글 한 편이었기에 계간지 같은 곳에 실리나 했다. 뒤에 이 책은 위즈덤하우스 출판사 위픽 시리즈 <이런, 우리 엄마가 우주선을 유괴했어요>로 나왔다. 신기했다. 출판사가 진행하는 서평은 해봤어도 작가가 읽어달라는 글을 읽었는데 책으로 나오다니. 그때 내가 읽은 소감이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무슨 잡설을 했던 것 같아 도움이 1도 되지 않았지 싶다. 부끄러운 마음이다.
<갈아 만든 천국>은 래빗홀 출판사에서 펴냈다. 이 출판사에서 서평을 몇 번 했지만, 이번만큼은 서평 대신 내가 직접 구매해 읽고 싶어서 참았다. 청소년 문제집을 사러 간 어느 날 청소년 문제집을 사며 슬쩍 내가 읽고 싶은 책 한 두 권 끼워 넣어 남편 카드로 결제하는 기술 들어갔다. 서평은 하지 않았지만, 내돈 내산 아닌 남돈 내산이 되어 버렸다. 남이 타준 커피, 남이 차려준 밥상이 더 맛있잖아. 남(편) 카드 썼으니 더 재미있게 읽고 있는지 모른다. 남(편) 카드로 근래에 여러 권 샀는데 여느 때보다 더 기대에 찬다). 책을 펴기 전 표지를 한 번 훑어보고 책날개를 지나 목차로 간다. 은근히 나는 뒷면을 챙겨 보는 편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다. 목차는,
허무한 매혈기
내게 주어져 마땅한 힘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라면
가족을 찾아서
핏빛 귀한
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인 장편소설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허무한 매혈기를 읽는다. 허무한이라는 이름의 주인공 이야기다. <갈아 만든 천국>은 마법 능력이 있는 사람 이야기다. 배경은 지금 우리 모습. 내신과 생기부를 챙겨 대학 입시를 하는 딱 지금 우리 모습. 지명도 창원, 한강, 영남 다도해, 낙성대역 등 매우 구체적인 현재 지명을 썼다. 주인공 허무한은 마법 등급 A-를 가진 뛰어난 마법 종족이다. 비록 A+은 아니지만, 이 정도 등급도 매우 특출난 능력이라 눈으로 물을 만드는 것쯤은 일상이다. 예를 들면 식당 가서 테이블에 물이 부족하다고 직원을 부르지 않는다. 그냥 물을 생성시켜 마시면 그만이니까. 이 능력으로 직원 노동력 상승이다.
작가가 얘기하고 싶은 SF는 이런 것들일지 모른다. 거창한 초능력자가 나타나서 사회를 정의롭게 하거나 기후 위기를 과학 기술로 멋들어지게 해결한다거나 <파견자들>처럼 지구 이후의 지구 모습을 그린다거나 하지 않고, 단지 아주 조금 현실을 비틀어서 SF 한 꼬집 넣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효율성이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거리들. 지금도 마법으로 식당에서 물을 만들면 직원을 한 번 덜 부르고. 그러면 직원의 피로도는 아주 조금 낮아지겠지. 기억에 남는 작가의 소설 내용 중에 지금의 청년이나 중장년층이 나이 든 20-30년쯤 미래를 그린 내용이다. 인스타를 언급했더니 도토리 사던 싸이월드 감성 자아내며 듣는 어린아이들. 에어팟의 기능 중 듣기 싫은 소리를 걸러내준다거나. 뭐 그런 것들. 소소하지만 있을 법하고 미래에 있다면 추가될 법한 기능들이라든지.
심너울 작가 SF는 현실보다 더 리얼하다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다. <갈아 만든 천국> 책 띠지에도 적혀 있다.
현실보다 더 리얼한 판타지
심너울의 21세기 마법 사회 풍속
단순히 지명이나 현대 모습이 들어있다고 현실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마법이라는 특출난 재능(?) 능력(?)이 있지만 용돈(씀씀이를 위한 여유자금)을 벌기 위해 골수 기증하듯 마법력을 팔고 몸이 망가져 전 학년 장학금을 받고 들어간 S대 응용마법학과(맞지싶다)에서 일정 성적을 거두지 못해 장학금을 토해내야 하는 상황에 놓여 휴학계를 낸다. 더 적었다간 결말까지 말할 것 같아 여기까지 적는다.
허무한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되고 현채라는 마법력을 가진 야구 선수가 나온다. 현채도 소설의 요소인 역경, 고난, 사건이 있겠지. 허무한과 현채가 어떤 접점이 있는지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뒤에 나오는 이름 중 허무한의 대학 동기인 지현 이야기가 나온다. 혜정도 누군가와 접점이 있을 것 같지만 아직 모르겠다. 등장인물의 개인 이야기면서 연결되는 장편소설이다. 얼마 전 읽은 <먼 빛들>도 이런 구성이다. 앤솔로지 분위기가 나지만 장편소설인. 유행하는 구성인가. 이런 구성 좋아하지만, 너무 많으면 또 식상하니까 가끔 만나고 싶다(하하).
16쪽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당신은 한강 가까이에 사는가? 만약 그렇다면, 한강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는가? 서울 같은 구조는, 그러니까 하나의 도시를 이토록 깊고 넓은 강이 관통하는 구조는 지구 전체에 극히 드물다. 허무한은 이 도시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며칠 전(일주일 전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쓴 홍세화 작가 부고 소식을 들었다. 한강이 도시 전체를 가른다는 표현을 만날 때마다 떠오르는 책이다. 이 책에서 언어의 장벽 없이 이야기하는 작가의 장모와 이웃집 할머니 모습을 표현한 문장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28쪽
언젠가 그는 허무한에게 창조술로 술을 만들 수는 없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허무한은 에탄올을 창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술은 단순히 에탄올과 물을 합친 게 아니라, 여러 성분이 든 매우 복잡한 혼합물이다. 그렇게 복잡한 혼합물을 오직 마법만으로 만들어내려면 뛰어난 마력을 가진 사람이 오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여튼, 허무한은 도대체 어떻게 이주영이 자신이랑 같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는지 가끔 의아해하고는 했다.
물을 만들 줄 안다니까 술을 만들어 달라는 이주영. 그대는 진정 한국인ㅋㅋㅋ 허무한의 대처가 현명하다. 우문현답이네. 술 자체가 창조술이지.